너 자신을 알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소크라테스」가 등장할 무렴 아테네에는 「페리클레스」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융성한 시기를 맞게 되었다. 페르시아와의 두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다음 아테네는 방대한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고 이러한부강을 바탕으로하여 「페리클레스」는 문화평책을 펴서 아테네를 『그리스 전역을위한 학원』으로 만들계획을 세웠다. 그 결과 야심에찬 청년들이 사방에서 이곳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여 나타난 일단의 논객들이 이른바 「궤변론자」들이다.
궤변론자들은 입신과 출세에 급급한 청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교양과 덕을 전파한다는 구실로 여러가지 변론술과 수사학 혹은 처세술을 가르쳤다. 「플라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그들은 『스스로 지자(Sophist)요, 교사임을 공언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것을가르친다고 뽐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한 논법은 「양립논(Dissoi logoi)」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것이 귀에걸면 귀걸이요, 코에걸면 코컬이라는식의 논쟁술이었다. 이러한 논법에 의하면 「고르기아스 (Gorgias)」의 표현처럼 절대적인 진리는 『있을 수 없고 있다고해도 알수 없으며 안다고해도 전할 도리가 없는것』 이었다.

<변증법적인 대화>
이것이 사실이라면 진리는 탐구되는 것이 아니라 편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에 지나지않게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사상적 풍토에서 분연히 일어선 사이였다. 그가 보기에 아테네는 쑬모없는 논쟁과 불의와 퇴폐로 가득차있는 타락의 소굴이였다. 여기서 그는 애국적인 정열을 가지고 『잠자는 조국을 깨우기 위해』등에 (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변증법(Dialektike)」이라는 형식의 대화를 나누며 과연 누가 진정한 현자인지를 알아보고자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작 만난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무식한지 조차 모르는 궤변론자들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알려져있던 「프로타고라스」를 만났다.
이 궤변론자의 가르침은 이러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나에게 나타난대로 내게있고 또한 너에게 나타난대로 네게있다. 그리고 너도 나도 인간이다.』 그는 이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니 존재하는 사물의 척도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사물의 척도이기도하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소크라테스」는 여기에 만족할수가 없었다. 그는 실망을 감추고 이러한 질문들로 응수하였다. 돼지나 개가 아니고 왜 하필 인간이 만물의 척도인가.
인간이 모두 만물의 척도라면 우둔한자들과 현자인 당신의 차이는 무엇인가. 더구나 만약 『인간이 만물의 척도』 라는것이 옮다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인 당신의 척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지혜의 학문으로>
분명히 이러한 질문들속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치밀한 논리적 분석이 담겨져있다. 사람들에게 덕을 가르친다고 큰소리치던 「프로타고라스」도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이미 환갑이 지났고 「소크라테스」는 약관 20세때의 일이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델피에 있는 아폴로신전에 가서 누가 진정한 현자인지를 다시 물었다. 무녀가 전한 신탁은 당혹스럽게도 『「소크라테스」, 바로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것을 『아! 우리 모두가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나홀로 그 사실을 알고있으니 내가 제일 현명하다는 뜻이로구나…』로 이해하였다.
그는 또한 신전 입구에 새겨진 경구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라는 말을 되새기며 이 가르침을 아테네의 모든 시민에게 전할것을, 말하자면 깊은 무지의 장에 떨어진 시민들을 일깨우는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렇게해서 철학은 만물의 근원을 묻는 『지식의 학문』 으로부터 자기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지혜의 학문』으로 변모된것이다.
산파를 어머니로 둔 「소크라태스」는 사람들이 진리를 스스로 해결할수 있도록 돕는 산파가 될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나누며 피상적인 지식에 자만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고 흑은 확신을 가지고 저돌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아버지를 고발하려고 법정에 뛰어드는 사제 「에우티프론」을 가로막으며 「경서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그는 장황한 설명끝에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지만 「소크라테스」는 『신들도 서로 다투기가 일쑤인데 도대체 어느신이 좋아하겠는가?』 하고 다그쳐 물었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트라시마쿠스」 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는『힘이 곧 정의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힘센 폭군도 정의의 사나이인가?』 「소크라테스」의 질문이었다.

<진리를위해 독배>
후에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고 일컫는 이 대화방법을 통하여 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사견을 넘어 객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에 다가갈수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임신이나 출세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그의 가르침이 반드시 즐겁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사람들은 흔히 충고를 바란다고 말하나 정작 듣고싶은 것은 칭찬이나 아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알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페리클레스」가 이미 사라졌고 퇴폐와 향락으로 가득찬, 그리고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진리와 정의의 수도 많아진 아테네의 거리에서 「소크라테스」의 외로운 가르침은 한낱 재수없는 노인의 잔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테네 시민들은 소위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이철인에게 독배를 마시게하였다.
스스로 그토록 안타깝게 찾던 신을 모독했다는것과 그토록 혼신의 노력을 쏟아 가르쳤던 청년들을 그가 현혹시켰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 불의에 찬 사회가 현자들마저 제거해버렸을 때 외부의 침략자들은 비로소 회심의 미소를 짓게 마련이다. 결국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우리는 『악법도 법』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절규하며 쓰러져간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장면을 눈물없이는 읽어나갈 도리가 없다. 그의 죽음은 진리를 위한, 그러나 구원의 기약도 없는 최초의 순교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처형과 동시에 기독교가 태어났듯이 「소크라테스」의 텅빈 독배속에서 진정한 철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카데미아」란 진리의 사당이 그의 제자인 「플라톤」 이라는 반석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