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7)제80화 한일회담(116)|「야쓰기」특사 귀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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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야쓰기」특사는 당초에는 1박2일의 방한일정이었으나 첫날 이대통령과의 성공적인 회담이후 하루 더 머물면서 이기린국회의장을 예방했다.
유태하공사와 장경근의원, 그리고 내가 『이왕 어렵게 방문했으니 하루 더 일정을 연장해 이의장을 만나고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한데 따른 것이다.
유공사와 「야쓰기」특사는 그들 나름의 계산을 공동으로 갖고 있었다. 즉 한일회담은 전면에서는 관주도지만 막후에는 양국 정계의 거물들의 입김이 작용하고있다는 인식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한 이틀째인 20일 서대문사저로 이의장을 예방했다. 병약했던 이의장은 그를 맞아 그가 동경에서 가진 회견을 화재에 올렸다. 『선생은 5년간이나 결렬되어 있는 한일회담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회담주선을 스스로 자원했다고 답변했는데 일본에도 선생과 같은 대한 적극론자가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오.』
이의장은 그러면서 「야쓰기」특사에게 자민당 중진의원들에 영향력을 행사해 공산세력에 대항하는 한일친선관계의 수립을 도모할 수 있는 여건조성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야쓰기」특사는 정계의 실력자를 만나 자신의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일본에서는 본인의 방한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여론이 있읍니다. 특히 외무성 등에서는 본인을 대단히「귀찮은 존재」로 취급해 반발하곤 있으며 심지어 내가 초대한 일본대사를 노려 이런 선동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입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항간의 질시나 풍설에 개의치 않고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막후에서 묵묵히 도울 생각입니다.
일본사랑들의 일부에서는 한일회담은 한국이 통일되고 난 후에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의 정권이 교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등의 사람이 있으나 공산권이 자유진영을 노리고있는 현재의 국제정세에서 그러한 「한가한」생각은 대단히 그릇된 것일 뿐더러 자유진영의 결속에 많은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이의장을 만난 후 「야쓰기」특사는 이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정이라 불렸던 남산팔각정에 물라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단시일 내에 전후 복구를 한 서울에 감탄을 연발했다.
「야쓰기」특사의 방한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촉각을 세워 그의 동정을 탐색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예컨대 어떤 신문은 『「야쓰기」씨는 보통의 일본인·평균 신장보다는 월등하게 컸으며 몸무게도 20여관은 충분히될 거구로서 주목을 끌었는데 그의 음성도 매우 처음이였으며 여러모로 음성적인 인상을 갖춘 것으로 보였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몸무게가 20여 관쯤되는 거구로 여러모로 음성적인 인상을 보인다고 보도할 정도였으니 당시 세간에 뿌린 화제는 짐작할 만하다. 정부도 국민감정을 고려, 그의 신변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써 그의 주변에는 늘 사복경찰을 배치했다.
21일 상오 귀국한 「야쓰기」특사는 22일 「기시」수상을 만나 이대통령의 진서와 이대통령이 당부한 말을 충실히 전했다.
일본신문들도 동경에서 진행되고있는 한일회담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방한중 한국국민의 일상생활이 풍족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이대통령은「기시」수상을 깊이 신뢰하고있으며 「기시」씨의 집권중에 한일양국의 우호관계가 수립되기를 바라고있었다』고 말했다.
「야쓰기」특사의 방한으로 양국관계는 상당히 호전되는 분위기를 보였지만 그 성과가 한일회담에 반영되지 않았다.
오히려 파국을 향해 일보일보 다가서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하옇든 한일관계의 특수한 진면목을 그대로 노정하는 사태 진전이었다.
이대통령이 「기시」수상정권에 기대를 걸었던 그 순간 한일회담은 담보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그것을 빌미로 정치적 야심에 불타있던 「후지야마」외상은 엉뚱한 발상을 가지고 한일양국관계의 국면을 타개하려고 은밀하게 공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총련과 북한의 공공연한 공작을 「후지야마」외상이 받아들여 재일동포들을 북한에 송환시키는 계획, 즉 북송추진정책으로 나타났다. <계속>김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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