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맨 얼굴의 네루다, 생생한 숨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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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빠블로 네루다
(원제 Pablo Neruda)
애덤 펜스타인 지음, 김현균·최권행 옮김
생각의 나무, 703쪽, 2만5000원

"나는 시를 쓰기 위한 무슨 처방을 책에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인간사에 대한 연대감도 시인으로서의 나의 의무에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1971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문학상 시상식장. 67세 시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블로 네루다(1904~73). 이 칠레 시인은 모순에 가득 찬 남아메리카를 격정적으로 비판해 '혁명 시인'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잉크보다 피가 가까운 시인' '형이상학을 버리고 거리의 피를 노래한 시인'으로 불렸다.

하지만 영국 BBC방송 기자 출신인 지은이에 따르면 네루다의 삶을 모티브로 삼은 소설과 영화 '일 포스티노'가 그린 시인의 이런 모습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사실 그의 시는 그의 정치적 궤적과는 상당히 무관했다. 세상에 대한 아이 같은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한 서정시였다. 실제로 시인은 "내가 쓴 시를 다 합하면 7000여 쪽쯤 될 것이다. 이 가운데 정치를 주제로 쓴 것은 네 쪽도 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사랑을 더 자주 노래한다"라고 썼다. 인간관계에서도 정치적 신념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었다. 네루다가 불후의 이름을 얻은 원동력은 이러한 근원적 휴머니즘에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네루다左가 미국 뉴욕의 한 카페에서 극작가 아서 밀러와 대화하고 있다. 폭넓게 사람을 사귄 네루다는 1966년 국제펜클럽 회의 의장이던 밀러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좌파 시인이었으며, 민중에게 가장 사랑받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기도 했다. "터널처럼 나는 외로웠다" 등 가슴을 후벼파는 생생한 감성언어의 극치를 보여준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는 이미 60년대에 100만 부 넘게 팔렸다. 스페인어로 된 시집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시집이기도 하다.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 시인은 굴곡의 현대사를 거치며 좌우로 찢긴 칠레에서 국가통합의 상징적 인물이 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대작가의 인생 여정을 정밀 탐사한 평전이다. 시인이 남긴 말과 글에 다른 이의 관찰과 평가, 거기에 제3의 객관적인 자료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궤적을 낱낱이 펼쳐낸다. 지은이는 구체적이고 엄밀한 취재로 그동안 신비와 정치적 주관에 가렸던 네루다의 다양한 면모를 고루 밝혀 한 인간의 거대한 지형도를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화적인 색채와 환상적인 분위기라는 두터운 외투를 철저히 벗겨냈다.

대신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시인의 체온과 숨결에 한발 더 다가간 느낌을 준다. 젊은 바람둥이 학생에서 20~30년대 버마.실론.싱가포르 등 낯선 땅을 돌아다닌 청년 외교관을 거쳐 내전 중인 스페인에서 난민 2000여 명을 피신시켜 목숨을 구한 '쉰들러' 같은 사연을 겪고, 망명 반체제 작가 생활을 하기까지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그와 동시대를 살며 인연을 맺었던 사르트르.엘뤼아르.아라공.파스.피카소.리베라 등 예술가와 마오쩌둥.카스트로.게바라.트로츠키.아옌데 등 정치인의 삽화를 네루다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책이 주는 보너스다.

"내가 죽더라도, 나보다 오래, 넘치는 맑은 힘으로 살아남아/창백한 자, 시들한 자들의 마음을 격정으로 끓게 하라"('백 편의 사랑 소네트'에서)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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