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스타] '오! 브라더스' 촬영 이정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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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조용하다. 밤 9시, 어두운 정적이 대형 건물을 휘감고 있다. 연한 가로등 빛을 받고 서 있는 정원수는 이곳이 인간의 생로병사를 압축 파일로 보여주는 병원이란 걸 잊게 한다. 지난달 말 분당 산자락에 새로 들어선 서울대 병원 정경이다.

3층 외과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이정재(30)·이범수(34) 주연의 ‘오! 브라더스’(감독 김용화) 촬영장이다(환자들은 불가피하게 다른 병동으로 피신했다). 바깥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촬영·조명·연출부 등의 발길이 분주하다. 배우의 동선을 일일이 확인한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액션”.

멜로 연기의 확장=촬영 직전, 이정재의 밴에 올라탔다. 그가 책을 펴고 있다. '레스토랑 데코레이션'이란 영문책이다. 번역서 '카페의 역사'도 있다. "연기면 연기, 사업이면 사업, 정말 투철하네요"라고 물었다. 그의 대학로 음식점이 떠올라서였다. "대본만 계속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것 같아요. 에세이도 틈틈이 읽어요"라고 대답한다.

"사실, 준비를 너무 많이 한 영화입니다. 촬영 개시 전 보름 동안 실제처럼 연습했어요. 오히려 숙달된 연기가 나올까 걱정됩니다. 약속에 따른 연기는 안 좋을 수 있거든요."

부드럽다. 이런 모습이 그를 멜로영화의 단골 배우로 만들었을까? '순애보'(2000년),'선물'(2001년),'오버 더 레인보우'(2002년) 등 애틋한 사랑담이 최근 그의 주 종목이다. 그런데 소위 '대박형 상품'은 없다. 배우는 이를 아파할까.

"아쉽긴 하죠. 그렇다고 (대박을) 놓쳐서 후회한 적은 없어요. 그래도 제 개인적 취향이 들어가는 영화가 좋거든요."

"개인적 취향?"

"같은 멜로라 해도 꼬집어 울리거나, 닭살스런 표정을 짓는 건 싫어해요. 캐릭터가 주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신작도 그런가요."

"역시 사랑 얘기죠. 이번엔 대상이 연인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코믹 터치도 들어가죠. 사실 코미디는 부담스러운데 감독이 저는 코미디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둘이, 따로 똑같이=다시 병원. 동생 봉구(이범수)를 둘러업은 상우(이정재)가 응급실로 뛰어 들어온다. "도와주세요"를 외치며 봉구를 침대에 눕힌다. "무슨 병이에요"(의사), "조로증, 조로. 아니 당뇨요."(상우) 겁에 질린 표정, 흙빛 얼굴이다. 허둥지둥, 정신이 없다.

'오! 브라더스'는 남의 불륜 사진이나 찍으며 사는 상우가 이복동생 봉구를 만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휴먼 드라마다. 상우는 가족에 대해 털끝 만한 애정도 없는 인물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는 가출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던 것.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그에게 빚만 남기고 세상을 뜨고…. 이복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빚을 나눌 요량으로 봉구를 찾아가나 동생은 정상인보다 빨리 늙는 조로증 환자. 나이는 열둘인데 외모는 형보다 늙어 보인다.

"둘이 함께 나오는 장면이 90% 가까이 됩니다. 이런 영화도 처음이죠. 1998년 '태양은 없다'에서 만난 적이 있어 문제는 없죠. 범수씨 연기 너무 잘해요. 어디서든 남우 주연상을 탈 겁니다."

갑자기 상대 칭찬, 그만큼 여유가 있는 걸까. "봉구는 성격이 강한 캐릭터죠. 제 반응에 따라 범수씨 연기의 진실성이 드러납니다. 제 역할은 완충지대라고나 할까요. 코끝이 찡한 감동을 기대하세요."

능력인가, 운인가=이정재는 올해 데뷔 10년째다. 나이도 '또 하루 멀어져가는' 서른이다. 그는 신작이 연기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흔한 상투성 발언? 아니었다.

"재능에 비해 복에 겨운 생활을 했죠. 능력에 비해 운이 따랐던 것 같아요. 이번에 달라진다면 연기의 호흡입니다. 좀더 상황에 충실하려고 해요. 뭔가 덧붙이려는 게 없을 겁니다. 관객은 모를 수도 있죠. 그러나 배우는 알아요."

그간 달라졌다면?

"서른이 되면 시야가 트일 줄, 연륜이 뼈 속에 박힐 줄 알았어요. 아니더군요. 노력이 부족했겠죠. 그런데 충무로는 많이 변했어요. 영화는 이제 철저히 오락이죠. 예전엔 소설 한 권을 읽은 것 같은 뿌듯함을 주는 영화가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시나리오를 찾기 어려워요. 언어도 직설적이고요. 재미는 늘었는데 낭만은 줄어들었죠."

어느 인문주의자의 고백 같다. 지난 10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저력일까, 아니면 수사(修辭)일까. 추석께 개봉할 '오! 브라더스'가 실마리를 줄 것이다. 숨을 돌렸다. 상우와 반대로 스토커 당한 적은?

"한번 있었어요. 결혼하자고 사무실까지 찾아왔죠. 잘 돌려보냈는데, 솔직히 도와주고 싶더라고요. 그 아이 가족은 뭘하고 계셨는지…. 가족, 정말 풀기 힘든 문제죠."

박정호 기자

<사진설명>
할리우드 영화 '레인맨'을 연상시키는 '오! 브라더스'에서 주연한 이정재(左)가 이범수를 업고 있다. 이정재는 "피보다 진한 한국인의 가족 사랑이 담긴 영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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