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방석…은행장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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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은행장은 이제 가장 두려운 자리중의 하나가 됐다. 흉직이 된 것이다.
은행장으로 앉는 순간부터 단명의 불명예 퇴진이라는 거의 정석적인 미로를 각오해야하며 때로는「업무상 배임」 「수뇌」 등의 오명과 혹독한 세평을 각오해야한다.
짧은 재임기간동안 주어지는 권한이나 명예는 수시로 어려운 결정을, 모든 책임을 지고 내려야하는 고층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영복사건·속산파동등 금융계가 함께 홍역을 치른 7O년대 초의 대형 경제사건때만 하더라도 은행장의 경질은 요즘과 다름없이 빈번했지만 은행장의 「구속」만은 매우 드물었다.
그만큼 은행공신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은행장의 권위와 이에 대한 일반의 믿음은 살아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해의 이·장사건과 최근의 영동사건은 하나같이 관련 은행장의 구속으로 점철돼 은행장 자리를 마가 낀 자리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이같은 은행장의 구속사태가 몰고 온 파문과 상처는 매우 크고 깊을 수 밖에 없다.
금융기관 임원들은 물론 금융계 전체에 대한 공신력의 실추는 말할 것도 없고 「배임」 이라는 굴레를 피하기 위한 은행임원들의 「몸조심」 은 은행의 자율경영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어왔다.
은행장 자리가 마치 공직생활의 종착역과도 같이 돼버린 요즈음에는「행장감」 들이 서로 자리를 고사하는 풍토가 생겨날 정도로 「금융난세」 를 사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많은 금융인들이 다시 생각케 됐고 은행원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7O년대 이후 경제사건에 연루돼 법정에 선 은행장들은 72년 외환은행 LA지점 부정대출사건의 홍용희행장부터 최근 조흥은행 영동사건의 이혜승행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6명.
이들은 모두 오랜 경험을 쌓은 끝에 금융계를 이끌 대들보로 인정받아 은행장의 중책을 맡았던 인재들이었으며 경제 사건과 관련돼 금융계를 떠날 때도 법정에서의 죄도 죄지만, 인재가 흔치 않은 금융계로서는 여전히 아쉬운 인물들이었다.
72년 3월부터 수사가 시작됐던 외환은행 LA지점의 6백30만달러 부정융자사건은 현직 은행장이 구속됐던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시 외환은 LA지점이 재미실업가 김모씨에게 6백30만달러의 부실대출을 해준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홍행장이 김모씨로부터 2백만원을 받았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홍행장을 수뇌혐의로 구속·기소했었다.
당시 홍행장은 8천만원상당의 예금을 갖고 있던 것 으로 밝혀졌고 일반은 그때까지의 기록을 깬 최고기록의 수뇌사건에 현직 은행장이 관련됐다하여 매우 충격적이었다.
두번째로 현직 은행장이 구속됐던 것은 지난 7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영복사건으로 이때는 중소기업은행의 정우창행장이 1년여의 재판 끝에 결국 업무상 배임등의 죄목으로 징역3년·집행유예 5년·추징금 3찬4백만원등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행장은 당시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박영복씨에게 대출을 해주는 대가로 모두 8백50여만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었다. 정행장은 산은출신으로 국민은행의 초대행장을 지내며 국민은행의 산파역할을 했던 당시 금융계의 중은이었다.
4개 은행장이 사임하고 그 후속인사로 10개 은행장과 은행감독원장이 한꺼번에 바뀌는 등 금융계 초유의 인사파동을 몰고 왔던 79년의 율산사건때는 유일하게 홍윤섭 당시 서울신탁은행장이 구속됐다.
당시 홍행장은 수뇌혐의는 받지 않았었고 율산의 부실대출에 대한 업무상 배임의 혐의만으로 구속·기소됐었는데 『언제 행장의 권한만으로 대출이 나갔느냐』는 금융계의 반발이컸었고 이후 업무상 배임이라는 굴레는 은행 임원들을 항상 불안하게 만드는 결과가 됐다.
79년 율산사건 이후 한동안 뜸하던 행장구속사태는 지난해의 이·장사건으로 다시 시작됐다.
이·장사건과 관련돼 구속됐던 공덕종 상업은행장과 임재수 조흥은행장등 2명의 행장중 공행장은 바로 율산사건 직후 상업은행장으로 발탁됐던 인물이었다.
또한 임재수행장의 후임으로 사건수습을 위해 기용됐던 인물이 바로 이번 영동사건으로 구속된 이혜승행장이어서 요즘의 금융계는 마치 행장수난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공·임 두 행장은 모두 당초 업무상 배임·수뇌등 혐의로 기소됐었으나 재판과정에서 매임·수뇌혐의의 일부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돼 많은 금융계 인사들이 이를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공·임 두행장은 아직도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중이어서 최종판결이 나지 않은 상태다.
어쨌든 길지 않은 국내 금융사를 엮어온 5개 시은중 지금까지 현직 은행장이 구속되지 않았던 은행은 한일·제일 2개 은행뿐 이다. 그나마 이들 2개 은행의 역대행장들도 「구속」 만 되지 않았다 뿐이지 이런 저런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채 도중하차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은행장의 몰락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이같은 사태는 물론 개인의 책임도 크지만 어찌보면 거의 운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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