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거꾸로 가는 일본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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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번 일본의 개각에는 남은 임기(내년 9월까지) 중에도 아시아 외교에는 개의치 않을 것이며 앞으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카드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강경 의지가 묻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아소 외무상은 고이즈미 총리로부터 외무상 제의를 요청받고 "나 같은 강경파가 외상을 해도 좋은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고이즈미 총리는 "후쿠다 내각 때도 일.중관계가 잘됐다. 강경파 쪽이 외교는 잘되는 법"이라고 격려했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이웃나라와의 갈등을 강공으로 돌파하겠다는 고이즈미의 오만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번 개각의 문제는 고이즈미의 아시아 경시 정책이 포스트 고이즈미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데 있다. 이번 개각에서는 포스트 고이즈미 4인방으로 거론돼 왔던 후쿠다 전 관방장관이 배제됨으로써 사실상 경쟁에서 탈락했다. 후쿠다 전 관방장관은 고이즈미에게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신중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등 아시아 외교에서 총리와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포스트 고이즈미 구도는 온건파인 후쿠다가 배제된 채로 강경파인 아베 관방장관과 우파인 아소 외무상, 그리고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으로 압축됐다.

현재 외교 관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아베 관방장관과 아소 외무상 두 사람 모두 미국과의 관계를 외교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친미인사인 만큼 일본의 외교관계 비중은 아시아 관계를 무시한 채 더욱더 미국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크다. 이 점에서 포스트 고이즈미 시대에도 일본외교에서 한국과 주변국의 비중은 그만큼 낮아질 가능성은 높으며, 양국 간의 신뢰 회복도 많은 역경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주시해야 할 대목은 대북 강경파인 아베 관방장관의 등장이 북.일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일 교섭을 진행시킴으로써 한반도에 긍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 아베 장관 기용이 반대파를 포섭하는 고이즈미의 전략이라면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사실 아베 관방장관이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북 강경파라는 이미지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일본의 정치권에서 자주 들린다. 아베 관방장관이 북.일 교섭에서 강경파의 이미지를 불식하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에 적극성을 띤다면 동북아 질서에 일본이 순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는 일본 외교정책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나아갈 가능성은 적으며, 오히려 미국과 함께 아베와 아소의 강경파 목소리가 반영돼 한반도를 압박하는 정책으로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일본이 미국의 힘을 업고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인 역할을 확대하려고 한다면 그만큼 갈등도 높아질 수 있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듯이 갈등의 폭이 깊어지면 그만큼 감정적인 앙금도 깊어져 치유하기가 힘들어진다. 일본의 외교 수뇌부는 한국과 주변국들에 감정적인 앙금을 쌓기보다는 신뢰를 보여 주어야 할 때다. 이와 더불어 한국도 일본에 제도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을 위한 방법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