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식의 소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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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성철종정은 『미물 곤충도 우리를 증오하고 있다』고 신흥사 승려살인사건을 개탄했다.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질타의 대상이 되어도 그 인격이 격하되는데, 사고하거나 언어표현도 없는 미물 곤충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면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 삶은 정화하여야한다.
우리들 불가의 독성각이나 산신각에도 독성님이 호랑이 등을 타고 있는 탱화가 있는것을 볼수있다. 이는 맹수가 수도자와 함께 동거하고 더 나아가서 수도자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예삿일이 아닌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들을 「저항의 멸진」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기도 정도이상의 전압을 받을때 저항이 생기고 결국에는 불이 나거나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류는 적정한 전압으로 송전되어야 하고, 또한 가정에서 일정용량을 초과하는 전기를 마구 쓰게되면 전압이 올라 종국에는 과열로 인한 재해를 입게 된다.
인간들에 있어서도 저항을 초감케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아집이나 독선을 내세워 자기폭으로만 몰아붙이려고 하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제 나름의 원동력이 내재하고 있는것이다. 이 생명의 원동력을 서로 마찰하지 아니하고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려는 철학을 선재시켜야 한다. 마냥 자기 힘의 강세만 믿고 다른 상대를 괴롭힐때 저항의식이 발동하게 한다.
불교는 무아자비를 내세우고있다. 무아는 녹기의 이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철학의 구준처이며, 자비는 무아의 사상을 실재적으로 실천하는 구원의 심행상이다.
무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비를 실천할수 없으며, 자비속에는 이미 무아가 선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무아자증한 자비궁행은 저항의식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입도출가의 길은 무엇인가. 근본무명으로 비롯한 자기 마음속에 자리하고있는 저항의식을 멸진시키는데 있는것이다. 만약 수도자의 마음 한구석에 저항의식이 잔재하고 있다면 이것은 초발심변증각이라는 불언을 망각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무아와 자비의 공능을 발현하는것이 아니고 자기 저항의 업력을 밖으로 작용시키는 소행이 아닌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할때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부파불교의 상좌부 교단이 자파의 교리나 신앙형태만이 최상의 것이라 하여 각파간의 분쟁이 오래 지속되어왔고, 그동안 대중교화에 등한히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생각있는 사람, 믿음이 강한 사람, 구원을 새롭게 찾는 사람이 가남이나 저사를 떠나 이룬 일단의 조직이 탑신앙으로 결속하여 새로운 믿음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출가중으로 시작한것이 아니라 재가대중으로 조직된 대승적 믿음의 발로였다. 역사는 항상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것이다. 한국에도 길가중심의 불교에 귀의하는 신도수가 많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하나의 불타」로, 「참다운 불교」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특수조직의 교단에의 귀의만으로 가능한것인가고 회의하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다는것을 인정하여야 할것이다.
또한 불교의 상식화된 교리는 인과에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다. 이 인과교설은 청문자에게 들려주는 인과가 되어서는 안된다. 탈법자에게도 인과가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나아가 출가·소임자에게도 인과가 적중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한다.
그 인과율에 대한 교설이 바로 직접화법으로 응신되는 자기에게 무한한 소식이 오고있음을 받아들여야한다.
항상 소식은 자기에게 오는 소식이 절박할수도 있고 기뻐할수도 있다. 불교는 남의 소식에 속아 사는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많은 소식을 자기쪽으로 송신하고 응신하였다. 그것은 바로 개혁의 소식이었다.
정화이후 숱한 개혁제도를 내놓고 교단정비에 나섰다. 도제의 양성, 역경의 현대화, 포교의 적극화등이 주안점이었다. 또한 근래에는 사찰운영의 합리화, 승려유급제, 본산중심제, 종회제도의 재고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묘안이 나왔다. 그러나 잘 이행되지도 않고 사회의 빈축도 받는 빈도수는 더 높아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찍어 말하고 싶은것은 출가이전의 마음이 출가이후 변심된 사실이 없는가 묻고싶다.
끝으로 불교계에 고언을 드리고 싶은것은 지금 우리의 불교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교 분리시대에 있는 지금 어느 종교가 국리민갈올 위하여 기여하고 있는가 하는것을 절감하여야 한다.
한국 불교가 우리를 지지하고 합장하는 믿음의 마음에 희망을 주어야하고 고달프고 신음하는 육신에 기쁨을 주는 보살의 불교로 발전하여야 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불자들은 저항의식이 무화되어·미물곤층이 우리들 자비심으로 모여들게 하여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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