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표 "자유체제 지킬 건가" 청와대 "질문에 정략적 저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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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일 당 상임운영위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또 한번 질문을 던졌다. 18일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의 정체성을 공개 질의했던 그 질문이다. 그는 "왜 아직 답이 없는가. 답을 못하는 것인가, 안 하는 것인가"라고 재촉했다.

사실 박 대표와 청와대는 지난 며칠간 동문서답(한나라당 측 주장), 혹은 우문현답(청와대 측 주장)을 했다. 박 대표는 '당신의 정체는 뭐냐'라고 물었고, 청와대는 노 대통령을 대신해 '질문의 저의가 뭐냐'라고 받아쳤다. 결국 박 대표의 "구국운동"과 청와대의 "선동정치 중단"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박 대표의 공개 질의를 분석해 다섯 가지 질문으로 잘게 잘라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물어봤다.

다섯 가지 질문엔 강정구 교수가 주장한 '북한의 만경대 정신''맥아더 장군은 원수라는 견해''자본주의가 아닌 방식의 통일'에 동의하느냐는 내용이 포함됐다.

익명을 요구한 청와대의 핵심 관계자는 "우리라고 강 교수 주장이 마음에 들겠느냐"고 반문했다. 강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민정수석은 박 대표가 질의하기 전인 16일 "언론에 보도된 바대로 보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이 있다"고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 대표 측은 "그 정도로는 답이 아니다"고 말한다. 전여옥 대변인은 "박 대표는 꼭 대통령의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말은 믿을 수 없으니 대통령이 직접 "아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박 대표의 또 다른 질문은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겠다는 것이냐, 아니냐'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정략적 이해에 따라 틈만 나면 남의 정체성이나 체제문제를 편의적으로 들이댄다"고 일축했다. 답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마지막 질문은 '이 정권이 왜 강 교수를 두둔하느냐'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질문에 가장 성실하게 대답했다. "불구속하더라도 수사를 하는 법적 절차가 있다. 우리는 과잉 대응일 수 있는 인신 구속만은 신중하게 하자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이런 대답에 박 대표는 만족하지 않았다. 박 대표 측은 "불구속 수사를 통해 인권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강 교수를 두둔하기 위해 불구속 조치한 것"이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강 교수를 두둔하는 이유가 자유민주.시장경제 체제를 흔들기 위해서 아니냐는 것이다.

일단 양측의 질문과 답변은 성립됐다. 청와대는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선 박 대표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래도 관계자들이 익명을 요구하며 간결한 답변으로 대치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청와대 측은 "박 대표의 질문에 청와대의 정체성을 처음부터 의심하면서 문답의 주도권을 쥐려는 정치적 저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에게 문제를 내놓고 잘 대답하면 칭찬하고, 잘못 대답하면 혼내주겠다는 태도가 아니냐는 식이다. 그래서 청와대 측은 굳이 공개적으로 답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의 정체성을 수시로 의심하는 박 대표의 질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소수의 인권을 유린하는 반자유민주주의적 발상법이 있다는 것이다.

박 대표에게도 노 대통령의 답변을 재차 요구하는 정치적 배경이 없을 수 없는 듯하다. 그의 정체성 공개 질의가 보수층의 지지를 받는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내에선 "구국운동 같은 퇴로 없는 이념투쟁이 오히려 한나라당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박 대표의 강경투쟁에 호응이 적다.

박 대표의 재 질문은 당내 긴장도와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비쳐진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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