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5. 개화기의 列强 인식 <4> 러시아-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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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곧이어 대한제국의 붕괴로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는 남북한을 갈라놓았으며, 냉전에서 소련의 패퇴는 한반도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러시아의 성쇠(盛衰)가 우리 운명의 바로미터로 기능하고 있으니, 개화기 이래 한국인들의 러시아 인식과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도 오늘의 생존전략을 가다듬는 데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크게 보아 개화기 이래 우리들의 생존전략은 미국.영국.일본 쪽에 서느냐,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 편에 서느냐 둘로 압축됩니다. 어떤 전략을 취하는가에 따라 러시아는 침략자 혹은 독립의 옹호자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로증(恐露症.Russophobia)에 감염된 유길준, 러시아의 경제침략에 반대한 독립협회 관계자, 소련을 사회혁명을 책동하는 위협세력으로 인식한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우파와 남한의 위정자들은 러시아를 침략세력으로 보았습니다.

반면 인아책(引俄策)을 구사한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 아관파천을 추진한 친러파,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세력과 북한의 집권세력들은 러시아를 둘도 없는 우방으로 여겼습니다. 냉전 해체 이후 러시아는 남북한 모두에 적국도 우방도 될 수 있기에, 러시아를 보는 남북한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 표류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신념에 바탕한 선악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었다면, 개화기나 요즘처럼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어느 편에 서는 게 득이 될지를 먼저 살피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개항 이후 과거 도덕률이 지배하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세상에서 무난한 보호자였던 중국과 이전까지 큰 탈 없이 지내오던 일본이 침략자로 돌변하자 조선의 위정자들은 이들의 야욕을 막기 위해 생면부지의 미국에 새로운 보호자가 되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지요.

미국에 대한 구애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버리자 이번에는 차선책으로 중국과 일본이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러시아에 추파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도 일본의 팽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보호국화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독일.프랑스와 같은 대륙세력과 연합함으로써 막아냈지만 결국 영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동아시아 진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해양세력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데 반대하지 않았고, 해양과 대륙세력의 쟁패에서 대륙세력 쪽에 판돈을 걸 수밖에 없었던 우리 위정자들은 끝내 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와 중국은 38도선 분할과 6.25전쟁 개입으로 한반도의 절반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게임의 룰이 이념의 대결로 바뀐 냉전시대의 쟁패에서도 승리자는 해양세력 쪽이었습니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가로막은 제국주의 일본의 내부모순은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오만한 제국' 미국보다 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미국이 당시의 러시아처럼 약체화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세기 전 러시아의 무릎을 꺾은 일본처럼 미국이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시 돌아온 열강 쟁패의 시대가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1백년 전 우리 선조들이 원했던 해양세력 편에 우리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 세기 전, 이해를 놓고 열강들이 편을 가르던 시절에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기보다 남의 힘을 빌려 살아남으려 했다는 점입니다.

한 세기 전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배신으로 끝나버렸고, 새로 사귄 러시아도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10년 늦출 수 있었을 뿐입니다. 자강에 바탕을 두지 않은 세력균형 책략은 나라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수난의 역사에서 톡톡히 대가를 치르고 깨달은 우리의 경험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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