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와 백만장자 사이|선진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지의 허실(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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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수상관저가 있는 다우닝가에서 불과 1km도 안되는 차링 크로스 기차역 철교밑, 새벽4시. 해진 담요 두장으로 깔고 덮고 잠자던 열댓명의 거지들이 일제히 부스스 일어나 그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청소자가 와서 호스를 들이대고 물을 뿌리기 때문이다.
청소차가 지나간 다음 다시 와서 자리를 잡고 눕는다.
상오9시쯤 그중 몇명은 철도밑 싸구려 해장국집에 들어가 끼니를 때운뒤 지나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한다.
차링 크로스 (역 철교밑 거지들의 하루 일과는 이렇게 시작된다) 역부근 공원등이 그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코벤트가든에도 언제나 아슬아슬한 칼춤을 보여주거나 또는 악기를 연주한후 구경꾼들로부터 몇푼씌 받아내는 사람들을 볼수있다.
지하철 입구 인도 곳곳에서도 동냥을 위한 3류악사들의 악기연주 혹은 구성진 노랫소리가 행인들의 발목을 잡는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실업자 수의 증가에 비례해 철교밑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지하차도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국의 실업자는 80년의 2백l만명(실업률 8.3%)에서 금년 5월엔 3백20만명(13.3%, EC국 평균실업률 10.7%)으로 껑충 뛰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영국정부는 이들 실업자를 고루 보살핀다.
영국정부가 순수히 사회보장제도를 위해 지출하는 돈은 1년에 무려 3백44억파운드 (83년기준 한화 약4O조원). 전체공공지출의 30%이며 이는 영국국방예산의 두배에 해당한다.
이미 l890년대부터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보장을 실시했고 1911년에 실업보험및 보건보험제도를 도입한 나라이니까 별의 별 수당및 은전이 많다.
보건사회보장성의 사회보장분야 대변인 「아이언 매키니」씨는 『영국엔 거지가 있을수 없다. 있다면 그들이 거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는 얘기밖에 안된다』고 말한다.
실직자라 하더라도 가족을 거느리고 있으면 아이수당, 가족수입 보충수당, 실업수당을 타면 생활은 꾸려갈수 있기 때문에 공원에서 술병을 들고 하루를 지내고 철교밑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거의가 홀몸들이다.
『1주일에 정부가 주는 20.65파운드 (약2만5천원)의 실업수당갖고는 내 술값,담뱃값 그리고 방값을 당해낼 수 없어요. 정부쪽 직업알선센터에서 이따금 일자리를 마련해 주지만 그것은 하루 이틀이면 끝나고….결국은 이렇게 거리로 나오게 된 것이랍니다.』
차밍 크로스 역 철교밑에서 만난 한 50대 실직자의 얘기.
지난해말 현재 정부가 실업수당을 지급하고 있는 대상자는 2백90만명, 가족수입 보충수당을 타먹는 사람은 17만명.
실업자가 계속 늘고있으니 무작정 사회보장예산을 증액할수도 없다.그러니 수당액도 비현실적일수밖에 없으며,더구나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란 더 어렵다. 런던거리에는 그래서 거리의 떠돌이들이 늘고 있다.
【런던=이제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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