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5) 제79화 육사졸업생들(208)-거제도 「9.17 폭동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생도1기생 3명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만난 것을 계기로 잠깐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었었던 중요한 사건 몇가지를 이야기하고 넘어가고자한다.
51년4월 친공포로수용소 국기게양대에 붉은 별이 그려진 북괴군 깃발이 게양되고 그들이 군가를 불러도 유엔군은 미온적인 태도로 적당적당히 그들을 설득해서 사태를 무마시켰다. 그러나 어느날 통영지방의 농민들이 포로수용소에서 나오는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려고 수거해 가다가 끔찍한 사실을 발견했다. 수용소의 인분통은 드럼을 반으로 쪼갠 것이었는데 그속에서 토막난 시체가 나온 것이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안에서 인민재판을 해 반공포로들을 돌로 쳐죽이거나 몽둥이질을 해서 살해한 다음 인분통속에 쳐넣거나 수용소안 으슥한 곳에 파묻어 버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도 수용소 당국은 범인을 잡아내지 못했다.
『포로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포로를 고문할 수 없다』는 제네바협정 제16조의 규정을 공산주의자들은 교묘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반공포로들은 5l년7월5일 새벽 드디어 궐기했다.
반공포로들이 수용됐던 제83수용소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면서 포로들이 운동장으로 몰려 나왔다. 이때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는 포로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반공포로를 위장한 친공포로임에 틀림없었다.
과격한 포로들은 이들을 몽둥이로 갈겼다. 친공수용소에서 반공포로들이 당한 수난을 반분이나 푼셈이다. 그러나 미군경비대는 장갑차까지 동원, 반공포로들을 해산시켰다.
9월초순 제85 친공포로수용소에서는 인민재판을 벌여 13세짜리 소년을 비롯,13명의 포로를 죽였다는 사실이 수용소 당국에 알려졌다.
친공포로들은 13세짜리 소년을 발가벗겨 몽둥이질해서 살해한뒤 눈과 혀를 빼 시체를 철조망에 걸어놓았던 것이다.
이 끔찍한 사건이 터지자 지금까지 친공포로들의 만행에 대해 모르는체(?)했던 유엔군당국도 바짝 긴장했다고 한다.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장군과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직접 거제도에 내려왔다. 그러나 포로들을 처벌할 구체적인 방안을 찾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다.
유엔군측의 미지근한 태도는 결국 친공포로들의 기만 키우는 꼴이 되어 친공포로들은 이른바「9·17폭동」을 일으켰다.
「9·17폭동」이 터지기전 9월15일밤 제77 친공포로수용소에서 30명의 반공포로가 살해됐으며 16일에는 제76수용소에서 40명, 제62수용소에서 28명등 친공측이 주도권을 잡은 7O단위, 80단위 수용소에서 무려 3백여명의 포로가 숨졌다.
51년9월의 거제도는 바로 생지옥이었다.
9월17일 새벽2시를 기해 친공포로들은 일제히 철조망을 끊고 나가 수용소옆에 있는 화력발전소를 파괴하고 수용소에 불을 질렀다.
이들의 계획은 발전소를 파괴, 거제도를 암흑세계로 만들어놓고 수용소 경비사령부를 습격, 점령한 뒤 트럭을 탈취해 부산으로 쳐 들어가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폭동 하루전 경비사령부는 친공포로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비, 부산에서 3개 대대병력의 미군헌병과 3개 장갑차중대를 증원 받았기 때문에 폭동은 곧 진압되었다.
미군과 한국군 경비사령부의 조사결과 이 폭동의 총지휘는 북괴 장교들의 수용소인 제66 군관수용소에서 했으며 군관수용소안에는 길이 30m의 지하실까지 파놓았고 지하실속에는 폭동때 사용할 사제 무기와 식량까지 저장돼 있었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당국이 포로들에게 기술습득교육을 실시했던 공작실을 무기 제조실로 이용했던 것이다. 빈깡통에 폭약을 넣어 만든 폭탄도 수백개나 발견되었다.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웠던 동무들은 포로수용에서도 전선과 같이 싸워라. 수용소안의 반동분자를 처단하라. 그러면 모든 과오는 면제되고 영웅으로 추대한다』는 북괴지령문까지나왔다.
수용소당국은 친공포로 간부 수명을 붙잡아 국제재판에 회부, 며칠간의 노역을 시켰을뿐 더이상 어떤 가혹한 처벌을 할 수 도,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기야 미군경비사령관이 포로들에게 포로가 되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게된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