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민주화 종착역이 공산화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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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민주화 장정 20년, 그 마지막 정거장이 공산화인가. 절대로 그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국민은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려 하고, 김정일 정권에 돈이든 뭐든 더 갖다주지 못해 안달이고, 북의 아리랑축전을 단체로 구경가고, 심지어 노동당 창당 기념식에 축하하러 갈 기세더니 드디어 대학 교수가 공산 적화 못 된 한을 만천하에 공개 선언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무덤에서 좋아 벌떡 일어날 일이지, 공산주의 원조 러시아에서도 전시된 레닌의 시신을 영원히 매장하려는 판인데, 웬 공산주의 찬양가인가. 우리는 도대체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2005년 9월 30일 강정구 교수가 대한민국이 공산화됐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한국 공산주의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제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떳떳하게 나온다는 시그널이다.

강정구 교수가 공산화 당위성의 근거로 1946년 여론조사의 일부만을 발췌, 자기 이론에 맞춰 편의적으로 해석하는데, 부분을 떼어내 왜곡.선전.선동하는 것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잘 쓰는 수법이다. 보수 반동으로 몰아 숙청할 때, 인민 재판할 때, 그리고 최근 친일 인사 분류에도 사용된 선전술이다.

그리고 설령 여론이 맞다 해도 무릇 여론과 역사의 관계는 무 자르듯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미국 독립 2년 전 1774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다수 영국 식민지 미국인들은 기존 영국 지배 체제에 만족했다. 독립에 찬성한 사람들은 보스턴에 몇 안 되는 소수 지식인들뿐이었다. 강 교수 해법을 빌리면 미국은 독립되지 않았어야 옳다.

그런데 하필 오늘의 이 시대에 공산주의 선언이 나오게 되었을까. 강 교수는 화려한 경력의 전투적 민주화 투사는 아니다. 한때 그들이 '수구'의 대명사라고 부르는 신문사에도 취직 문을 두들겼던 적이 있는 사람이다. 자신과 가족이 미국 혜택도 상당히 보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나서기에는 좋은 조건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상황이 얼마나 무르익었으면 자기 모순을 무릅쓰고 60대의 유약해 보이는 노학자마저 나섰을까. 기실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온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론이 강정구 선언을 낳은 것은 아닐까.

9.30 강정구 선언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이후 다수 국민을 수구.보수로 몰기, 부자 증오하기, 국민 편 가르기, 기업 때리기, 기업 대표와 대학 총장 막 다루기 등 다분히 중국 공산당의 문화혁명 때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강정구 선언은 누구보다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모호한 말로 얼버무리지 말고 명확하게 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국민은 공산화 위협에 협박당하고 있는데 야당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2004년 7월 11일 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애국 세력을 부정하고, 국가 정체성을 흔드는 상황이 계속되면 전면전을 선포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면전은커녕 오히려 여당이 할 말인 '상생의 정치'만 외쳐왔다. 대통령이 마구 휘두르는 칼날을 붙잡고 허둥대는 꼴만 보여왔다. 야당으로서 견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오늘의 이 위기는 대변인의 짤막한 발표로 될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9.30 강정구 발언은 대한민국과 국민에 대한 테러다. 9.30 테러다. 미국이 당한 9.11 테러보다 한국인들에게 준 충격과 공포가 더 크다. 우리에게 공산주의자들은 수백만 희생과 천만 이산가족 등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남겼다. 더욱이 강 교수의 우리 사회 주류가 미국을 숭배하는 자발적 노예주의에 빠졌다고 하는 말은 침묵하고 있는 다수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노예'들을 '해방'시킬 전쟁이 또 일어나야 한다고 하는 건가. 국민은 누구의 노예도 아닐 뿐더러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은 죽어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대한민국만이라도 '하느님이 보우하사' 공산화가 안 된 것을 천만다행이고 천우신조로 생각한다. 그런데 공산화되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고, 일생의 한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니, 앞으로 민주화의 가면을 쓰고 민족의 이름을 팔면서 회색지대에 숨어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지상으로 속속 나올 것이다. 이들의 부상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관열 강원대 교수. 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