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철군 협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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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슐츠」미 국무장관의 왕복외교 결과이긴 하지만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직접 협상을 통해서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철수 협정이 공식문서로 조인된 것은 중동 평화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래의 큰 진전으로 보인다.
이 협정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작년 6월 세계여론의 비난 속에 레바논에 침략해 들어갔던 4만 명의 군대를 철수하게 되고, 레바논은 이론적으로는 주권국가로서의 통치권을 전국에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철군협정에 조인한 이스라엘이 엉뚱한 조건을 제시하여 레바논의 안정과 평화 회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스라엘은 레바논과의 철군협정에 조인을 하고도 그것을 실천하는 단계에 가서는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과 PLO 게릴라의 동시철수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4만 명의 시리아군에 대한 레바논 「지배」를 방지하는 것이 이스라엘 군대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주장은 중요한 요소 하나를 감추고 있다. 시리아군은 레바논 정부의 요청에 의해서 레바논에 주둔해 있고 이스라엘 군대는 명백한 침략군이다.
두 나라 군대의 주둔 동기가 같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조건에 설득력이 더 붙는 것은 아니다.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철군협정을 맺어 이스라엘의 침략군을 먼저 내보낸 뒤에 그 다음 단계로 시리아에 레바논에 주둔한 시리아 군대의 존재이유가 없어진 것을 명분으로 레바논-시리아 철군협정을 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중동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레바논-이스라엘-시리아 3자 협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침략군인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가 중동평화의 큰 전제가 되기 때문에 미국도 레바논-이스라엘 협정의 실현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시리아군과 PLO가 동시철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떠나기를 거절한다면 철군협정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일단 레바논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레바논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아랍세계의 지원을 얻어 시리아군과 PLO게릴라의 레바논 철군을 요구할 것이다. 레바논 정부가 시리아군의 주둔요청을 철회하면 시리아는 점령군의 낙인이 찍히지 않고는 레바논에 계속 주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리아가 레바논-이스라엘 철군협정에 강력히 반대하는데는 소련의 지원이라는 배경이 있다. 소련은 캠프데이비드 합의에서 비롯된 미국 주도의 중동평화를 저지하고 시리아에 대중동 영향력의 교두보를 확보하려고 한다.
소련의 그런 야망을 좌절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다음 단계로 시리아군을 물러나게 하는 짓이다.
소련의 방해 때문에, 그리고 소련이 시리아를 부추기기 때문에 시리아가 레바논 철군을 반대한다는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혼돈한 논리요, 이스라엘의 선전을 사실인양 받아들이는 구미 주요신문과 통신들의 「언론식민지주의적」 발상이라고 하겠다.
이스라엘은 작년6월의 레바논 침략 이후 친이스라엘 세력의 강화에 성공했다. 이번 협정에는 레바논·이스라엘군이 공동으로 남부 레바논을 순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레바논 정부가 전국에 대한 통치권행사를 서둘러 이스라엘에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는 인상도 남는다.
소련은 분명히 중동평화의 훼방꾼이다. 그러나 소련의 방해가 있어 시리아가 철군협정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철군협정에 반대하기 위해서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다. 소련과 시리아의 야합을 와해시키고 중동 평화의 실마리를 푸는 길은 이스라엘이 속셈 뻔한 주장을 버리고 레바논과의 협정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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