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뽀빠이"맥가이버' … 외화 1000편 번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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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외화 1000여 편을 번역한 30년 경력의 번역작가 박찬순(59.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겸임교수)씨. 그는 번역을 '소통의 미학'이라고 했다. 30년 번역 인생을 되돌아 보며 최근 출간한 책의 제목을 '그 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한울아카데미)로 한 것도 "번역이란 이국적인 영상에 우리 말로 혼을 불어 넣어 누군가의 가슴에 닿게 하는 작업이라는 뜻에서"라고 설명했다.

좀 더 쉬운 말로 설명해 달라는 주문에 그는 롱펠로의 시 '화살과 노래'를 인용했다.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쏘았네/ 화살이 떨어진 곳이 어딘지 몰랐네…먼 훗날 어떤 참나무에서 나는/ 아직 부러지지 않고 박혀 있는 그 화살을 찾았네'

"잘 된 번역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꽂히고 그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그가 번역을 시작한 것은 1975년.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방송국 PD로 일하다 결혼과 함께 주부로 살았다. 연년생인 두 아이를 낳고 나서 번역을 시작했다. 그리고 76년 번역 작품인 '나의 생애 골다 메이어'가 히트하면서 본격적인 번역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이 번역한 어린이 만화영화 '뽀빠이'와 '날으는 수퍼맨'이 인기를 끌면서 외화를 전문적으로 번역하게 됐다. 89년 방영된 주말 외화시리즈 '맥가이버'는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 학창시절 '맥가이버'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또 화살을 찾았네"라며 웃었다.

박씨는 이번에 출간한 책의 상당 부분을 번역의 오역을 잡는 데 할애했다. 작품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이뤄지는 번역이 어떤 결과를 낳는 지를 지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쉽고 재미있는 번역만 강조하거나 저속한 단어를 그대로 옮기는 건 관객들에게 말초적인 즐거움만 줄 뿐이지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돕지 못합니다. 특히 영상매체는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20대가 선호하기 때문에 올바른 번역이 필요합니다."

평생을 번역에 몰두한 그에게 번역은 어떤 의미였을까.

박씨는 "번역이 아니었으면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의 잇단 사업 실패로 심리적.물질적 고통을 겪던 그에게 번역은 삶의 탈출구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곱씹다 보면 자연스레 애정 어린 눈을 갖게 되죠.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 생의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위안을 얻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게 번역의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번역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도 이것이라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번역을 하면 날림 번역을 피할 수 없어요. 좋은 번역을 하기 위해선 등장 인물을 사랑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 인물을 사랑하게 되면 번역의 비밀도 풀립니다."

글=박혜민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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