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도장 아닌 사인의 시대가 올 것 같다. 정부는 각종 민원서류 신청 때 도장대신 서명도 허용할 방침이다.
한말의 정부문서에는 반드시 호(국새)와 함께 기이한 모양의 사인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종은 큼지막한 「대한국새」를 누른 뒤에 또 반드시 「수결」을 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관행이다. 민원문서이건 사문서이건 간에 기명한 연후에 도장을 누르는 것이 보편적이다.
우리 나라에서 도장, 곧 인장이 사용된 것은 꽤 오랜 것 같다.
일제 때 한반도에선 대동강변 토성리 일대에서 무수한 봉니가 출토되었다. 대개 한사군의 하나인 악낭 유물로 전해지는 것들이다.
봉니는 고대 문서류나 귀중품을 봉합하는데 사용된 점토다. 말랑한 상태의 점토를 붙이고 동인으로 눌러 인문을 남겼다.
걸낭에선 목인도 출토 됐다. 이것이 목인 중 가장 오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국새는 예맥의 왕이 사용했다고 하는 「예왕지인」이다. 근 2천년전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때의 국새는 거의 요, 금, 원, 명이 보내온 것들이다. 치욕적인 일이다. 명은 1370년에 「고려국 왕지인」을 보내왔다.
조선왕조는 흔히 사대주의의 표본처럼 인식되지만 우리가 만든 국새를 썼다. 세종은「체천목민영창후사」, 성종은 「시명지보」다.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도 49년에 국새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지새」다.
그러나 인장의 기원은 BC5천년대의 메소포타미아 원시농경사회에서 볼 수 있다. 돌과 점토와 패각, 골, 금속을 재료로 그림이나 문자를 새겨 점토나 천에 찍었다. 소유물을 표시하는 목적 이외에 주술적 의미도 있었다.
중국에선 은대에 동인이 있었고 진한시대엔 화상인이 있었다.
그러나 동양에선 문언의 작성 때 인장으로 하기보다는 자서를 썼다. 그러나 붓 대신 손가락 마디를 찍기도 했다. 무인이다. 무인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사용함직도 하다.
「자서」는 본질적으로 개성을 뚜렷이 해서 제3자가 이용할 수 있는가는 문제 밖이었다. 초서체의2자를 이어 쓴 화합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돈황문서에는 「용위후빙 압자위정」(후에 증거로 삼기 위해 글자를 눌러 정한다)이라고 한 제약문서들도 나왔다. 당대의 서명 습관을 나타내 준다. 구미인의 사인도 사실은 개성과 증거주의를 강조한 「자서」와 다를 바 없다.
모든 계약체결에서 사인은 확실한 신용을 보장한다. 위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태양은 가득히』란 영화를 보면 배우 「알랭·들롱」이 사인을 위조하느라고 각가지 기재를 동원해 무진 애를 쓰는 장면도 나온다.
도장보다는 사인의 위조가 더 어렵고 문맹률도 거의 영%에 육박한 면실이 이제야 인정된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