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재벌 문제의 편견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한국 재벌에 대한 평가는 국내외에서 크게 상반된다. 해외에서는 경제 기적의 주역으로서 재벌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많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우세하다.

필자가 보기에 부정적 시각의 경제 논리는 대단히 약하다. 편견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 흔히 얘기되는 '선단식 경영' 혹은 '내부 거래' 문제를 보자. 현재 정부는 재벌개혁론자들의 입장에 서서 시장가격과 차이가 나는 계열사 간 거래는 '부당 내부 거래'로 규정해 과징금을 매긴다. 전 세계에서 내부 거래 자체를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러나 재벌들 입장에서 보면 내부 거래는 자신들이 그룹으로 존재하는 이유이다. 내부 거래를 통해 계열사들이 경영 자원을 공유하면 사업 확장이 여러모로 쉬워진다. 실제로 삼성전자나 현대중공업 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는 내부 거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중국.인도.이탈리아 등 많은 나라에서도 잘나가는 기업들은 대부분 그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계열사들이 지급 보증, 순환 출자 등으로 얽혀 있어 일부 계열사가 어려워지면 다른 우량 계열사들도 함께 어려워진다는 금융 위험이 따른다. 그렇지만 그룹은 이러한 위험을 부담하면서 확장에 보다 주안점을 둔 사업 조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재벌의 또 다른 폐해로 얘기되는 '가족경영'을 살펴 보자. 개혁주의자들은 마치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면서 바람직한 경영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계를 둘러보면 오히려 가족경영이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전문경영제도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의 경우에도 20대 상장기업 중에는 가족경영 기업이 20%이지만, 5만4000개 상장기업을 따지면 60%가 가족경영이다.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은 5000여 개 상장기업 중 60% 이상이 가족기업이다. 중국.인도 등 아시아에서는 민간기업들 중 가족경영이 압도적이다.

가족경영 기업들의 경영 성과도 평균적으로 좋다. 1990년대 미국 800대 기업을 살펴 보면 가족경영 기업들이 산업 평균보다 수익성이 33% 더 높았고 15% 더 빨리 성장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80년대 영국의 325대 기업에 대한 조사에서도 가족경영 기업들이 비가족경영 기업들보다 이익률, 매출 증가율, 자산 증가율에서 모두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재벌의 반사회적 행태라고 종종 얘기되는 '정경유착'도 따지고 보면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정치경제학은 중요하다. 정부 정책이 기업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기업인들이 정책 수립과 집행에 어떻게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에서 월스트리트와 자동차 3사가 가장 힘센 로비단체라는 사실은 최고 선진국에서도 경제와 정치가 따로 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내부 거래, 가족경영, 정경유착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건 단점은 항상 따라다닌다. 단점을 보완하면서 장점이 잘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내부 거래는 그 자체를 불법화하기보다 내부 거래 범위를 미리 공시하도록 해 소액주주들이 처음부터 이를 감안해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을 택할 수 있다. 가족경영 문제도 어차피 경영권을 누가 쥐는가의 문제는 주주들이 결정할 사항이니만큼 그 과정이 투명해지도록 만들면 된다. 정경유착의 문제도 정부와 기업 간 의사소통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제도적 틀을 잘 만들면서 해결해야 한다.

최근 국내의 재벌 논의나 정책은 재벌 문제가 마치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고질적 문제인 양 생각하고 이를 없애는 것이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는 이상주의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전제 위에서 진행되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기업들은 주어진 경쟁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경쟁한다. 사업 조직의 절대 선은 없다.

사업 조직에 대해 절대주의적 기준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논의가 정치화되곤 한다. 논리와 실증이 빈약한데도 불구하고 재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국내에 팽배하게 된 데에는 재벌 문제에 관한 논의가 이렇게 정치화됐기 때문인 것 같다. 또 그렇기 때문에 해외에선 잘 통하지 않지만 국내에선 잘 통하는 것 같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