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타임] 홀로 된 시어머니 멋진 새 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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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홀로되신 지 4년이 넘은 우리 시어머님, 올해로 연세가 예순다섯이시다. 언젠가 함께 저녁을 먹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내 나이에서 서른 살을 뺀 기분으로 살고 싶구나."

당시 나는 어머님이 적적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나보다 생각했지만 며칠 지나면서 진짜 변화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방의 인테리어. 아버님과 함께 쓰시던 중후한 느낌의 침실에 산뜻한 색조의 벽지로 새로 도배를 하니 마치 여왕의 방처럼 화려해졌다. 뿐만 아니다. 두툼한 보료도 걷어내고 싱글 침대를 들여놓으셨다. 어머님은 "젊었을 때는 나도 침대를 썼는데 아버님이 허리가 아프다고 하셔서 안 썼다. 이제 다시 쓰니 기분이 처녀 때로 돌아간 것 같구나"라며 좋아하셨다. 그러고 보니 방안에는 어느새 멋진 독신녀의 활기있고 신나는 느낌으로 가득했다.

그 다음은 옷차림이 바뀌었다. 아가씨 같은 A라인 원피스에 최신 유행 끈 목걸이를 달고 "어떠냐"하시며 날 깜짝 놀라게 하시더니, 며칠 뒤에는 몸에 붙는 스판 칠부 바지에 분홍색 티셔츠, 유행하는 주름 잡힌 헤어밴드를 착용하셨다.

뿐만 아니다. 화장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로션에 영양크림 정도만 바르시던 분이 기초화장 5가지를 설명서에 명시한 순서대로 충실히 이행하신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팩을 하신다.

또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최신 인기영화를 관람하신다. 보통 친구들과 가시지만 스케줄이 맞지 않을 경우 혼자서라도 빼놓지 않고 꼭 관람을 하신다. 나이 들면 친구들의 건강도 중요하다며 꼭 안부전화를 나누시곤 한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소홀하신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직 집안 대소사를 직접 관리하시는 만큼 아들 형제와 며느리, 손자손녀의 생일이나 기념일은 반드시 챙겨주신다. 특히 함께 쇼핑을 가자고 해서 따라나가면 아들.손자.며느리 옷까지 골라주시는데, 그 안목이 젊은 나보다 훨씬 낫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 친구분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 생각난다. "몸이 늙는 것이지 마음이 늙는 것은 아니란다."

이렇게 자신만의 멋진 인생을 새로 출발하신 어머님. 나도 나이 들어 늙으면 저런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태평양 횡단을 위해 하얀 돛을 올린 요트처럼 날렵한 우리 어머님, 항상 건강하세요.

최진희 (주부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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