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신의를 지키며…」국내 독점 연재|(미 소 정상회담 )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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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77년 1월 26일 나는 처음으로「브레즈네프」에게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나는 양국이 핵무기 감축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6일 후에는 「도브리닌」소련 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러 핵무기 제한을 위한 재 2단계 전략무기제한 협정 (SALT Ⅱ) 문제들을 토의했다 <주=saltⅱ 협정은 이란 인질 사건 (79년11월)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79년 12윌)이 있기 전 즉 미소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에 추진, 서명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소련 지도자들은 나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내가「포드」 「브레즈네프」간에 이루어진 불라디보스크 협정을 포기하고 앞으로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 든다고 믿는 듯 했다.
나는 두 번째 편지를 통해 인권문제에 관한 나의 입장, 소련에 대해 내가 결코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내가 핵무기 감축을 진정 원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브레즈네프」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일기 1977년 2윌 14일>
2월25일 「브레즈네프」는 답장을 보내왔다. 매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내가 의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내놓았다고 했다.
나는 「닉슨」과 「포드」대통령 시절 SALT의 주역이었던 「키신저」전 국무장관에게 미국의 새로운 제안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소, 핵 제의 의도 의심>
「키신저」는 만일 소련이 진심으로 군축 문제의 진전을 바라고 있다면 전체 핵무기를 대폭 감축하자는 우리의 제안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같은 해 3월 「밴스」는 2개의 안을 휴대하고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제1 안은 이미 양국이 합의했던 핵무기 보유량을 10% 더 감축하자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협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앉는 것이었다. 제2 안은 더욱 실질적인 핵무기 감축을 단행, 상대방의 선제 공격에 대한 취약점을 감소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밴스」의 이 같은 제안도 즉각 거부됐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9월 27일 「그로미코」외상과 「도브리닌」대사, 그리고 「코르낸코」부외상이 나를 방문했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우리와 합의에 도달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했다. 그들은 두어 개의 문제를 제의하고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구상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미소 두 나라의 SALTⅡ협상은 본격화 됐다. 2년에 걸쳐 협상이 진행됐다.
79년 3윌 2일 「브레즈네프」는 자신이 SALTⅡ협상에 호의적이며 가까운 장래에 협정이 조인되기를 바란다는 서신을 보내왔다.
미소 정상 회담은 그해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당시 나의 보좌관들은 정상회담의 전망에 대해 퍽 비관적이었다.
나와「브레즈네프」는 6월 15일 오스트리아 대통령궁에서 처음으로 상면했다.
나는「브레즈네프」가 건강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정보 보고를 신중하게 검토했다.

<"미에 적대감 없다">
「브레즈네프」는 귀가 어두운지 통역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밖에는 기운차 보였다. 몇 마디 가벼운 대화를 나눈 뒤 「키르히술레거」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들어가 「키르히술레거」대통령의 간단한 환영사와「브테즈네프」의 답사가 있은 후 나는 이번 정상회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세 지도자의 인사말로 이날의 공식 일정은 끝났다. 나와 「브레즈네프」는 우리자신과 세계를 위해 회담이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점에 견해가 일치했다. 「브레즈네프」는 나의 어깨에 손을 얹고 『회담이 실패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열린 이틀째 회담에서 나의 요청에 따라 「브레즈네프」가 먼저 연설을 했다. 『빈 정상 회담의 중요한 성과는 SALTⅡ 협정을 끝맺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는 2차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으나 그 뒤 냉전 상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소련은 미국에 대해 전혀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도 그러길 바라는 바 입이다. 그런데 미국은 왜 최근 국방비를 대폭 증액시켜 군비 경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기생산을 제한해야 합니다.』
그가 연설을 마치자 나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본인은 어제 회담이 실패하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브레즈네프」서기장의 말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이제까지 군사적으로 적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체제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두 나라는 이 같은 평화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두 나라가 고위 회담을 갖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번 기회가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최대한 이용돼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 나는 소련이 지난 15년간 매년 국방비를 상당 수준 증액시켜 왔음을 지적했다. 또한 나는 모든 영역에서의 점진적 군비제한 확대, 유럽에서의 상호 감군, 그리고 SALTⅢ 협정 등에 관한 나의 관심을 표명했다.
회담은 하오까지 계속됐다. 회담이 끝난 뒤 「브레즈네프」를 비롯해 「그로미코」외상, 정치국원 「체르넨코」 「우스티노프」국방상 등은 우리들과 미 대사관 관저에서 어울렸다. 우리는 그들에게 술을 대접했다. 「브레즈네프」 곧 저녁식사를 요청했다.
「브레즈네프」와 나는 술과 손자들 얘기, 양국이 겪는 유류 부족 현상, 미국의 엄청난 자동차 등에 관해 환담했다.
저녁식사 도중 우리는 몇 차례 건배했다. 건배할 때마다 「브레즈네프」는 술을 쭉 들이키지 못하는 내게 잔을 비울 것을 조르면서 자신은 단숨에 보드카 잔을 비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성공적인 모임은 아니었다.

<브 주량 못 따라 고통>
다음날(6월 17일) 우리들은 소련 대사관에서 회담을 가졌다. 「브레즈네프」는 미 소 양국이 핵무기 생산을 중단해야하며 기존 핵무기도 어느 일방이 우세하지 않은 비율로 줄여나가야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는 특히 중동과 중공에 있는 핵무기에 관심을 나타냈다.
나는 소련 측에 대해 백파이어 기를 매년 30대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생산할 것임을 명백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나는 SALTⅡ 협정의 수락 여부가 바로 여기에 달렸음을 분명히 했다. 마침내 그는 『소련은 백파이어 전폭기를 1년에 30대 이상 생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미국이 백파이어에 상응하는 전폭기를 생산할 수 있는 권리를 유보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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