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넘기는 정치의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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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치의안이 또 한해를 넘기게 됐다.
지난 1주일 사이에 5차례 열린 여야총무회담은 9일 마침내 정치의안을 내년으로 넘기고 그동안 공전했던 국회상위를 정상화한다는데 합의했다. 「선정치의안처리보장」 또는 정치의안에 대한 「호의적 고려」를 요구하며, 상위에 불참해 온 야당측으로서는 얻었다면 처리시한을 약속 받은 정도다.
국회법개정안은 내년 4월에 결말짓고 지방자치제실시문제는 내년 6월에 「중간결산」을 한다는 총무들의 합의는 여당측의 「호의적 고려」나 언질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야당측은 여당이 일부 응하리라는 낙관적인 전망도 하고 있지만 역시 아직은 기대하기 이르다는 게 중론이다.
구체적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단위조합장의 선거제를 규정한 암·축·수협법개정안과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제정건의안에 대한 여당측의 호의적인 「심의촉진」약속인데 이 두 의안은 정치의안으로 보기 어렵다.
총무회담의 이 같은 결과는 일찍부터 예상되던 일이었다.
민정당은 야당측이 이번에 중점적으로 요구한 국회법개정과 지방자치제실시언질에 관해 처음부터 들어줄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고, 그밖에 정치피규제자해금, 언론기본법개정 등도 현시점에서는 고려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야당이 제안한 40여건의 의안들 가운데 들어줄 만한게 있는지 민정당은 면밀히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금년의 경우 예산안 통과에 야당이 협조해 보기 드물게 만장일치로 통과된 만큼 야당측의 「체면」을 세워주고 여야협조분위기를 지속시키기 위해 민정당으로서도 최소한의 야당요구를 충족시켜보려고 부심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검토결과 이 시점에서 들어줄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는 것.
학생독립기념일을 제정하자는 민한당측의 건의안정도는 여당 측도 한때 긍정적으로 했던 것인데 민한당측이 그동안 굳이 이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민한당 내 인간관계로 보아 이를 받아들이면 일부는 좋아하겠지만 일부는 싫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대로 덮어두기로 했던 것으로, 민한당이 막판에 이를 요구함에 따라 다시 긍정적으로 검토키로 한 것이다.
이 같은 민정당의 태도를 야당측도 처음부터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입장으로서는 다가오는 전당대회의 당권경쟁을 생각해야하고, 당장 정치의안처리는 어떻게 됐느냐고 따질 비당권파의 비판을 의식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예산안을 정치협상의 대상물로 삼는 것은 「구태」라 하여 정치의안과 결부 않고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보니 야당으로서는 이번 정기국회에서 거둘 이렇다 할 전과가 없는 형편이었다.
또 야당으로서 이미 한해를 묵힌 정치의안들을 정기국회에서 한번 제대로 추진도 안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입장이었음은 물론이다.
추진결과는 예상한대로 미동도 않는 민정당의 「벽」에 부닥쳐 또 한해를 넘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야당측이 비교적 쉽게(?) 정치의안의 내년 이월에 동의한 것은 당내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당권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야당은 「선명성」이란 명분을 강하게 추구하기 마련이고 당내도전세력이 크면 클수록 야당지도부의 대여자세는 강경해지기 쉽다. 최근 민한·국민당의 내부를 보면 당권도전세력의 움직임이 표면화하는 듯 하다가 주저앉는 듯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지도부로서는 안정성이 강화되는 만큼 대여신축성을 보일 수도 있게 하는 현상이다.
정치의안의 내년 이월로 금년정기국회는 결국 풍파 없이 회기를 끝낼 수 있게 됐다.
이제 며칠간의 상위활동으로 계류의안을 심의하고 나면 본회의에서 방망이 치는 것으로 정기국회의 90일 회기는 끝난다.
그러나 정치의안을 다루는 여야의 자세를 생각하면 몇 가지 아쉬운 점과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정치의안을 추진하는 야당의 자세와 능력의 문제다. 민한당은 이번 정기국회를 통틀어 자기들이 가장 중친 한다는 정치의안을 관철하겠다는 「의지」조차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심하게 말한다면 추진하는 의지도 능력도 허약해 보였고 뒷받침하는 당내 결속도 약했던 것으로 보였다. 또 일관성도 없어 보였다.
가장 중요한 예산안을 넘기고서야 문제를 제기했으며 그나마 여당이 받아들일 리 없다는 체념 속에 문제를 추진하는 인상을 주었다. 예산안과는 걸지 않았으면서도 상위운영에 정치의안을 걸었던 것도 일관성 있는 자세는 못되었다.
또 정치의안을 대하는 민정당의 자세도 온당하다고 만은 하기 어렵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며 미루는 걸 능사로 삼아서는 곤란하다. 국회법개정을 원하지 않는다면 개정불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하고 지방자치제실시가 이르다면 언제쯤이면 실시가 가능하겠다는 청사진이라도 내야 한다.
작년에 민정당은 새 국회법을 제대로 시행도 안 해보고 고치자는 건 말이 안되므로 충분히 시행해 본 후에 개정여부를 논의하자고 했는데 두 차례의 정기국회를 하고서도 개정여부를 판단 못했다면 곤란한 문제다.
지방자치제의 문제도 「정부가 연구검토 중」 「시기상조」라는 등의 말만 할게 아니라 아직 못한다면 못할 이유를 밝히고, 못할 요인에 대해서는 어떤 정책을 세워 어떻게 해결해 나감으로써 언제쯤이면 실시가 가능하겠다는 정도는 얘기해야 옳을 것 같다.
현재의 여당기조로 보아서는 총무들 간에 합의된 내년 4월, 6월에 가도 정치의안이 성사될지는 의문이다. 그때까지 국회 각 상위의 소위에서 여야 간 대화는 계속되겠지만 정치정세의 큰 변동이 없는 한 여당의 기본방침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내년 4월, 6월에 가도 여야 이견이 마찬가지라면 또 한번 소위에 계류시키거나 표결로 부결 또는 폐기처분 하는 길밖에 없다. 부결되면 야당은 또 기회를 보아 그 다음 회기에 같은 의안을 제출할 것이 뻔하고 그렇게되면 여야감정은 많이 악화되기 쉬울 것이다.
이 같은 코스야말로 생산성도, 합리성도 찾기 어려운 서로 피해가야 할 길인데 각 당의 속생각은 어떤지 알 수 없다. <송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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