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침략한 왜를 고구려가 격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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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고대 동아시아사의 1급 사료이자 한일고대관계사의 최대의 쟁점을 불러일으켜온 광개토대왕비문에 대한 연구가 일대 전기를 맞고있다. 이 비문을 토대로 고대일본이 한국을 식민지 경영했다는「남선경영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1880년 이비가 발견된 이래 한일 두나라 학자들이 벌여온 뜨거운 「백년전쟁」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새로운 학설이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단국대 서영수교수(동양사)는 3일 하오 연세대 국학연구원의 연구발표에서「광개토대왕능비문의 정복기사 재검토」란 발표를 통해, 지금까지의 연구의 한계성에서 탈피, 비문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연구의 시야를 새롭게 열었다.
오늘날까지 특히 논쟁의 초점이 돼온 부분은 비문 제1면 8행과 9행 사이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 32자로,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내도 해파백잔○○신라 이위신민』 -. 일본학자들은 이를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므로 조공해 왔으며▲신묘년(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격파해 왜의 신민을 만들었다고 해서,이른바 남선경영설의 결정적인 근거로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서교수는 조공등 당시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대외관에 토대를 두고 비문의 문장표현 분석등 구조분석을 통해, 앞의 신묘년기사중 「유래조공」 에서「유」는 「오히러」(=유)의 뜻으로, 「내」는 「미」에 대한 가획으로 보고. 「내도해파」중 「해」는 「왕」의 변조로 보았으며 결낙된 2자는 「왜」와 「복」자로 추정했다. 즉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나 조공하지않고 왜는 신묘년에 쳐들어 오므로 왕은 백제와 왜는 파하고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
지난 70년대 이후 비문의 연구가 한국학자들에 의해 본궤도에 오르면서 큰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나 방대한 연구결과에 비해 문제의 핵심엔 이르지 못한 느낌을 주어왔다.
서교수는 이진희씨로부터 비롯된 비문변조설은 일본참모본부의 음모와 일본근대사학의 연구체질에까지 관련, 비문의 재검토라는 연구사적 전환에는 일조했으나 비문의 구체적 내용연구에는 연결되지 못했다면서, 최근 일본의 신설 또한 비문의 전체적구조 이해라는 방법론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고대 동아교섭사에서 왜를 주도적으로 보려는 기본적 인식의 한계때문에 결과적으로 종래의 일본구설을 합리화하는 자체모순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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