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진보당 사건(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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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종전운동그룹에 대한 미측의 북행권유를 그들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한 때 박씨가 40일의 평양체류가 원인이기는 하지만 첩자로 의심받아 체포된 사실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위에 정부측과의 접촉교섭도 북진정책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고 자칫하면 용공내지 반역행위로 단죄될지도 모를 위험이 컸다. 그랬지만 결국 미 측의 설득을 받아들었다. 북행에 지명된 최익환씨의 결단이었다.
『이게 내 나이 60세, 지금까지 나대로는 노력한다고 했는데 무엇하나 민족 앞에 이룩해 놓은 것이 없다. 이번 일이 가장 크고 힘드는 일 같은데 평생을 결산하는 좋은 기회로 알고 북으로 가겠다.』

<"이박사에 얘기를">
이리하여 51년12월의 어느 날 최익환씨는 미군대령의 안내로 판문교를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들은 최씨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 약속된 10일이 지나고 또 10일이 지나도 최씨의 소식은 감감한 채였다. 미군 측은 그사이 여러 차례 소식을 물어 왔다. 정말 고통스런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해 박진목씨는 부산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대통령에게 털어놓고 종전운동의 출구를 열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박씨는 대구를 거쳐 부산에 이르는 동안 독립운동을 하던 원로들을 찾아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무모한 일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요로에 접촉했지만 대통령까지는 닿지 않는다고 했다. 이래서 박씨는 마지막으로 국회를 찾았고 조봉암부의장을 만나 경과를 털어놓게 된 것이다.
죽산은 박씨의 긴 얘기를 깊게 새겨들었다. 이승엽과의 면담을 말할 때는 <그래 이승엽을 만났어. 그 사람 잘 있읍디까. 나하고 인천서 같이 살았지>라고 말하며 옛친구와의 지난 일들을 회고하는 듯 깊은 상념에 젖어들기도 했다.
박씨는 결론지어 말했다.

<국민은 평화를 바라고 있읍니다….>

<글쎄요, 무어라 대답할 말이 없군요.>
죽산의 첫 답변은 막연했다. 그는 전란 중에 그가 보고 겪었던 비참울 얘기했다.

<전쟁을 끝내고 국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전쟁울 끝내야 한다는 것은 꼭 같은 생각이지만 딱한 일이요. 지금 실정은 평화니 전쟁종식이니 하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입장이오.>

<대통령께서 저희들의 종전운동을 이해하도록 힘써주십시오. 죽산선생께서 종전운동의 선봉에 서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오. 이승만박사께는 그런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요.><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군의 사기 등을 고려해서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저에게 대통령을 만나뵐 수 있도록만 해주십시오. 어떤 화를 당하더라도 말씀을 드려봐야 겠읍니다.>

<장내무장관 만나>

<그거 이대통령을 모르고 하는 말이오. 나는 그분을 민족의 지도자로 모시고 일을 해보려고 노력한 사람중의 하나요. 친근하게 서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해보았으나 같이 하기에는 힘드는 노인이오. 지금은 멸공이외의 다른 방법을 가지고 그분과 의논한다는 것은 되지도 않는> 박씨는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 어느 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죽산은 자동차를 준비시키고 나갈 채비를 했다. 박씨는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자 죽산은 <아니요.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죽산은 박씨를 영도에 있던 그의 숙소로 데려갔다. 둘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늦게까지 얘기했다.
「나도 애를 써보리다』 라는 것이 죽산의 그날 약속이었다.
그 며칠 후 박씨는 죽산을 찾아갔다.

<박동지, 최익환선생과의 종전운동이 널리 알려져 있는 듯 하오. 여러 사람들로부터 박동지의 말을 들었소. 조심해야 특무대장 김창룡같은 사람이 그런 내용을 알아보오. 큰일이나 난 것처럼 달려들테니 그에 대비하는 방편을 써야겠소.> 죽산은 그사이 여러 곳에 종전운동과 박진목이란 사람에 대해 알아본 모양이었다. 죽산은 대책을 생각해 볼 테니 2∼3일후 국회 부의장실로 다시 들르라고 했다.
그 며칠 후 죽산이 박씨를 안내한 곳은 장석윤내무장관실이었다.

<박동지. 장내무장관은 대통령하고 가까운 사이고 또 미국 쪽에도 잘 통하는 사람이니 그리 알고 말해 보오. 장장관은 나하고도 사이니 안 만나는 것 보다는 좋을 것이오.>
이리하여 박씨는 장내무를 만났다. <조봉암부의장 한테서 얘기 들었습니다. 대통령각하를 만나려 한다지요. 대통령께 드릴 말씀을 내게 말하시오. 내가 들어봐서 보고하고 대통령께서 만나자고 하시면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는 다시 한번 장내무에게 평양나들이의 결과를 세세하게 설명했다. <여기 주소를 적어놓고 가시면 내가 연락을 하리다.> 장내무의 말이었다.
그로부터 4∼5일 후 경남경찰국 소속의 한 경위가 박씨를 찾아왔다. 그는 경찰국으로 연행돼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내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조사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정중하고 호의적이었다.
그를 심문한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이런 방식으로 전쟁을 종결짓기를 원치 않습니다…설령 대통령께서 속으로 이런 마음을 어느 정도 갖고 계신다해도 전쟁 중에 국가원수가 일반 민간인에게 이런 운동을 위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생은 현실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읍니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돌려보내 주었다.
경찰국을 나온 박씨는 다음날 죽산을 찾아가 경찰에서 심문을 받은 일들을 얘기했다. 그러자 죽산은 곧바로 내무장관실을 다녀왔다. <앞으로 별 일은 없을 거요. 그렇지만 대통령을 만나겠다느니 하는 당분간 그만 둡시다.>
이처럼 죽산은 풍전운동 그 자체를 돕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감싸주고 대책을 세워주었다. 사실 그 무렵 전쟁은 이미 우리의 뜻과는 관계없이 휴전으로 방향을 잡고있었다. 이대통령이 내건 북진통일은 국민의 소망이기도 했고 그의 휴전반대는 휴전이후도 내다본 정치포석이기도 했다.
죽산은 이 때부터 이대통령과 거리를 멀리해갔다. 그렇지만 그 원인이 이대통령의 전쟁수행 정책을 반대해서는 아니었다. 국민방위군사건 등 행정의 난맥, 그리고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파동의 먹구름이 피난수도 부산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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