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과 아빠의 털조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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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마당 한가운데 은행나무 두그루가 초겨울을 재촉하는바람에 떨고 있다.
제법 노랗게 물들었던 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모습이 마음을 한결 공허하게 해준다.
이제 갓 한둘을 넘긴 딸 아이를 재워놓고 세수를 한후 화장대 앞에 앉았다. 콜드 마사지를 하려고 크림통을 열고 들여다보니 밑바닥이 보일 정도다. 화장대 위를 살펴보니 콜드크림 이외에도 사야할 화장품의 품목이 많다.
『어쩌면-.』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 품목을 체크해 보았다. TV뉴스에서는 이번 겨울이 무척 춥다고 예보한다.
월급날 아빠가 가져올 봉투의 부피를 생각해 보니 생활이 이것저것 서글픔의 투성이인 것같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저녁때 밥을 지어 아빠가 야근하는 양복점에 들렀더니 와이셔츠 차림이 추운지 따뜻한 국을 찾았다.
이제 추위가 가난한 우리집을 다시 썰렁하게 만들기 시작하나 보다.
사야할 화장품의 품목을 체크하면서도 그이의 추워하는 모습이 영 머리에서 떠나지않았다. 그렇다. 우선 그이에게 따뜻한 털조끼를 짜 주어야 한다.
그이가 얼마나 어려운 직장생활을 하는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화장품 한두가지가 없다고 투덜댈 일이 아니라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화장품값과 생활비를 조금 떼어내면 포근한 털조끼 하나를 충분히 짤 수 있다. 내일 당장 털실 두 타래를 사서 한겨울이 오기전에 조끼를 짜도록 하자.
내일저녁 그이가 퇴근하기전에 김치찌개를 따끈하게 끓이고 막걸리 반되쯤 받아두리라. 친정 아버님도 보신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겐 따끈한 막걸리 반주가 보신이 된다고 늘 말씀하셨으니.
이부자리를 펴며 그이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서글픈 마음과 공허한 느낌이 어느 사이에 사라지고 오밀조밀한 즐거움과 따스함이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울산시교동245의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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