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비서는 참모일 뿐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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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영어 ‘시크리터리(secretary)’만큼 해당자들의 신분 차가 큰 경우도 드물다. 미국과 영국에서 이는 ‘장관(長官)’의 직책명이다. 또한 회사나 기관의 고위직을 보좌하는 ‘비서(<7955>書)’의 직업명이기도 하다. 프랑스어 ‘세크레테르(secr<00E9>taire)’도 마찬가지다. s를 대문자로 쓰고 그 뒤에 ‘국가의(d’Etat)’라는 표현이 있으면 장관, 아니면 통상의 비서다.

 두 갈래의 크게 다른 일이 동일한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는 이유는 원래 장관과 비서의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쓰는 이가 드물던 시절에 문서 해독·작성 능력이 있는 이들이 국가의 사무를 맡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의 개인적 일을 돕기도 했던 데서 유래한 일이다. 문자로 기록하는 일을 맡는 ‘서기(書記)’가 소련이나 중국에서 공산당 고위직을 일컫는 용어로 쓰이고, 북한에서 노동당 간부가 ‘비서’라는 직함을 가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

 시크리터리의 어원은 라틴어 ‘세크레타리우스(secretarius)’다. 비밀을 다루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정부 문서를 정리하거나 중요 인물의 일을 돕는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를 유포하지 않는다는 직업적 책무가 표현에 담겨 있다. 더 근원적인 어원은 라틴어 ‘세체르네레(secernere)’다. ‘분리된’ 또는 ‘구별된’이라는 뜻의 단어다. 책무와 자아가 분리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비서는 조력자 역할에 충실해야지 주인 행세를 하려 들면 안 된다는 원칙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비서는 그 경계를 넘나드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는 경고의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 권력 실세와 비서가 구별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쿠데타로 단종을 몰아내고 집권한 세조는 가신 한명회·신숙주·구치관 등을 승정원으로 출근시켜 승지의 일까지 보도록 했다. 이에 따라 승정원이 최고 권력기관이 됐다. 승정원은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 승지는 비서관에 해당된다. 세조의 결정은 국가 최고 의결기관인 의정부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세조는 가신과 공신들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뒤 승정원을 정상화시켰지만 그 이후 다른 왕의 시대에도 승정원으로의 과도한 권력 집중이나 승지의 권한 남용이 문제가 되곤 했다.

 청와대 비서관은 문자 그대로 비서다. 비서실장, 수석비서관, 비서관 모두 대통령의 참모일 뿐이다. 자신을 실권자라고 여긴다면 장관과 비서를 구별 못하는 정도의 착각이다.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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