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 읽기] 큰 디자이너의 큰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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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2000년 뉴욕의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카림 라시드(中).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원제:Karim rasid,I Want to Change the World)
카림 라시드 외 지음, 김승욱 옮김, 미메시스, 247쪽, 3만 5000원

소유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싱글 여성들은 자기 컨셉트를 유지하기 위해 고가의 드레스를 덜컥 사들이는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저자 카림 라시드에 따르면, 우리가 하루에 손을 대는 물건의 갯수만 해도 500여개. 하지만 사람들은 '고유한 나만의 것을 얻는다'는 환상에 끌려 다시 물건을 사들인다. 물건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 뉴욕 디자인계 선두주자인 라시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뺄셈을 통해 덧셈을 해야 한다'고. 품질은 더 좋게 그러나 물건의 수를 줄여 시장을 전면 편집해야 한다는 그의 꿈이 드러나는 '죽이는' 수사(修辭)다. 즉 한 개의 물건으로 영화.음악이 주는 만족감, 그 이상까지를 갈 수 있다면 '적은 소유의 풍요'도 가능해질 것이라는 철학이다. 그가 제시하는 디자인의 틀은 통합과 탁상 제조란 두 개 기술로 요약된다. 통합이란 쉬운 얘기다. 반지를 끼면 체온을 잴 수 있고, 꽃병은 꽃 종 별로 산성 성분을 감지해 물을 갈아줘야 할 때를 알려주는 식이다.

탁상 제조란 현대의 화려한 편집술 즉 탁상 출판의 진화된 형태. 대량생산을 하면서도 '나만의'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제조 공정을 활용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곧 인터넷에서 원하는 제품을 선택하고, 업체는 이 맞춤상품을 소비자에게 배달한다는 것이다. 보통 단행본 판형의 두 배 이상인 이 큼지막한 책에는 휴지통.그릇.의자 등 그의 디자인을 대표하는 500여개 사물들이 매우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때문에 화보집에 가깝고, 활자는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신개념 책'이다. 그 구석에 카림의 변과 그의 절친한, 국제적인 디자이너들이 던진 찬사들이 아기자기하게 박혀있다. 역시 '큰 디자이너'는 품고 있는 생각부터 다른데, 다음 그의 보석같은 발언 몇 개에 귀 기울여보자. 그것만 챙겨도 뿌듯할 책이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하다. 인간의 지성과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오만한가? 나는 우리 주변의 물리적인 풍경에 긍정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물건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내 작품을 관능적 미니멀리즘으로 정의한다. 물건이 뜻과 영감을 전하면서도 여전히 미니멀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따라서 그에게 상품이란 단순한 공산품을 넘어 무절제와 시장의 유혹에 맞서는 대안의 가치다. 좋은 디자인이란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사회여건을 만들어내는 위력 넘치는 영역이라는 얘기다. 이집트 태생인 그는 '더 블랙' 현대명품카드 디자인으로 한국에 알려졌다. 지난 해에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를 위해 서울에 온 바 있다.

이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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