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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미래를 배반하는 한·일 갈등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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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해부터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정성 들여 준비했던 2005년 우정의 해는 매우 불안한 출발점에 서 있다. 독도 문제와 역사 왜곡 교과서 등으로 모든 행사와 관련된 동작이 일시에 멈추고 상대국을 향해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한.일 정상 사이에 연결된 핫라인은 전혀 가동되지 않고 있으며 대학교에서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두 나라 각급 학교 간의 교류 행사도 부분적으로 중지 또는 연기되는 일이 늘어났다. 다른 도시와 농촌의 지자체들도 사태를 지켜보면서 교류를 지속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눈치다.

사태가 더욱 악화하면 두 나라 행정부와 입법.사법부 간의 공식.비공식 행사 일정도 뒤죽박죽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일본 방위대학에 파견된 우리나라 사관학교 생도들은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하며, 한국 육.해.공군 사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일본 방위대학 학생들은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는다. 일본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신뢰를 의심받게 되면 양국 관계는 이처럼 곧장 냉각돼 버린다. 뜨거웠던 한류 붐도 우리들의 화두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한국을 방문할 분위기가 아니다. 그는 한국인과 노무현 대통령의 자존심을 너무 건드렸다. 노 대통령이 재작년에 국내 비판을 무릅쓰고 현충일에 일본을 방문했고 지난해 가고시마에서 정상회담을 강행한 것은 참여정부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과거사를 쟁점화하지 않겠다'는 발언까지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일본에 대한 저자세 굴욕 외교라는 공격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일이 이렇게 커지고 나서야 고이즈미 총리에게 배반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일본은 새 시대 새 감각으로 두 나라 우호 증진을 시도해온 한국 온건파의 설 자리를 무너뜨렸다. 결코 의도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결과는 그렇게 다가왔다. 거기에 어떤 계략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한.일 우정의 해는 사실상 물 건너간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빚어졌던 한.일 간의 역사 마찰을 되돌아보면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일본의 내로라 하는 거물 정치인들의 발언이나 교과서의 역사 왜곡 기술로 반일운동이 격화되고 다시 일본의 사과로 이어진다. 양국 역사공동위원회 등이 설치되면서 한국은 잠잠해진다. 일본에선 거의 주기적이라고 할 만큼 역사 왜곡 발언이 계속 된다. 그때마다 한국은 사죄를 요구한다. 일본은 "또 사과냐"고 짜증 낸다. 그런데도 한.일 역사공동위원회 같은 조직이 제대로 가동된 적이 없으며 이를 챙기는 양국 지도자도 없다. 양국 국민의 운명이며 숙명이라고 하기엔 너무 피곤한 일이다. 이에 따른 비용 지출도 엄청나다. 개미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역사 분쟁과 마찰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다. 역사에 관한 한 양국 역대 수뇌들이 되뇌었던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란 허구였다.

한국은 일본 지도층에 독일 수준의 역사인식을 기대하고 있다. 그것이 문제다. 일본은 일본이며 일본 지도층은 그들 수준밖에 안 되는 역사의식에 젖어 있다. 이런 현실을 한국이 인정하면서 일본과의 상생과 경쟁을 통해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선진 한국다운 일이다. 우리가 국력을 키우면서 역사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대책이며 일본의 역사인식에 배반당하지 않는 길이다. 우리가 잘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흥분하지 말라. 경쟁적으로 반일감정을 이용하려 드는 정치인이나 격앙된 일부 국민의 발언을 여과 없이 내보내는 언론의 경솔함이 안타깝기만 하다.

최철주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