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In&Out 맛] 계 부어 먹는 '명품 음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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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에 5000원이나 하는 흑산도 홍어, ㎏당 20만원 나가는 제주 다금바리, 한 두름에 20만원 하는 영광 굴비…. 이런 귀족 음식들을 적은 부담으로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물어보나마나 여럿이 십시일반 구입한 뒤 조금씩 맛보는 것이다. 이런 다금바리계.홍어계.자린고비계 등 별난 미식계(契)가 유행이다.

제주 서귀포에서 진미식당을 운영하는 강창건씨는 가끔씩 다금바리를 싸들고 육지로 날아온다. 직접 횟감을 들고 올라갈 때는 다금바리의 무게가 최소 10㎏, 크게는 40㎏이 넘는 대물이다. 강 사장은 부위별로 20가지 맛을 낸다는 다금바리를 직접 회 뜬다. 강 사장은 "요즘 경기가 어려워 이런 출장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종종 나간다"고 말했다. 여행경비를 제외하고 다금바리 가격은 ㎏당 18만원으로 제주와 똑같은 가격을 받는단다.

흑산도에서 홍어 소매점 흑산홍어닷컴을 운영하는 홍어 위판장 경매인 김훈씨는 삼복더위가 한창인 요즘에도 많은 홍어 주문을 받는다. 홍어의 고장 전라도에서 애경사에 쓰기 위해 주문하는 사람도 많지만 더 큰 수요는 서울에서 호출하는 홍어 미식가들이다.

그렇다면 사람 키만한 다금바리와 오리지널 흑산도 홍어를 주문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 다금바리나 흑산도 홍어는 수족관에 넘쳐나는 횟감이 아니다. '다금바리계'의 정체성은 귀한 물건을 기다렸다 맛보고 싶은 미식욕(美食慾)이다. 서울에서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점이 다소 거만해 보일지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갹출해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 미식 욕구를 즐겨보겠다는 영리한 계산이 들어 있는 것이다.

'홍어계'도 마찬가지다. 목포의 유명한 홍어 전문점의 홍어회 한 점 가격은 4000~5000원꼴이다. 4명이 앉아서 젓가락을 여섯 번 갖다대면 눈 깜짝할 사이에 12만원이다. 하지만 흑산도에서 직접 배달된 '1번(8kg 이상) 홍어'는 횟감과 택배비를 모두 합쳐 45만원, 잔치를 치르고도 남는다. 4명이 2kg씩 나눠 가져가면, 각자의 집에서 홍어 파티를 열 수 있는 양이다. 사람 수가 많을수록 적은 부담으로 맛볼 수 있다.

굴비 애호가들은 반년 전부터 부지런을 떨기도 한다. 조기가 많이 나는 추석을 전후해 직접 영광 법성포로 내려가 내년에 먹을 굴비를 미리 맞춰 놓는 것이다. 섶간을 해서 엮어 놓은 조기를 현지에서 구입한 다음, 굴비유통전문점에 내년 설까지 말려달라고 부탁한다. 조기 상태의 물건을 5만원에 사서 굴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5000원 정도의 '건조 비용'만 내고 가져가면 된다. 현지에서 5만원(20마리 한 두름)짜리 굴비는 백화점에서는 7만~8만원, 3만원 이상이 절감된다. 20만원짜리 오가(10마리 한 두름)의 경우 10만원 이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물론 이때도 여럿이 가서 많은 양을 선주문하면 부담이 덜하다.

이런 미식계를 만들려면 모임의 인원과 'n분의 1'로 나눠내는 추렴 금액을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노하우다. 자칫 계산을 소홀히 하다가는 한 번의 모임 뒤 계가 깨질 수 있다.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를 계주로 모시는 것도 좋다. 어렸을 때부터 먹어와 홍어 맛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전라도의 부잣집 공자, 전국을 돌아다니는 여행사 직원이나 버스 기사, 잡지에 나오는 맛집을 섭렵한 방송작가 등이 그런 부류들이다.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있다면 빨리 전화해서 계주로 앉히고 장부를 맡겨라.

김영주 프라이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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