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내 부모만 챙기는 요즘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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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가 그의 얘기를 들은 것은 며칠 전이었다. 몇몇 지인들과 보각사의 성원 스님을 찾아 인연을 화두로 삼던 중이었다.

부부의 인연보다 더 깊은 것이 부모-자식 간의 인연이라는 스님의 말씀에 한 참석자가 덧붙였다.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친구를 대신해 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받든 이가 있노라고-.

제 부모를 받들기도 힘든 세상에 친구의 어머니를 그것도 34년씩이나 받들다니. 나는 놀라움 반, 의아함 반으로 그를 찾았다.

그러나 김곤재(金坤哉.62.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2동)씨는 나의 경탄에 손사래부터 쳤다. "집사람이 대단하죠. 친구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데도 어머니에게 정성을 다했으니까요."

金씨가 들려준 친구 윤여덕(尹汝德)의 어머니 송기순(宋基順)씨와의 인연은 이랬다.

전북 익산 농림학교 정문 근처에서 이웃해 살면서 중.고교는 물론 전북대학까지 나란히 입학했던 두 사람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신문배달로 가까스레 학업을 이어가면서도 서로 격려하던 단짝.

친구네가 서울로 이사가며 尹씨도 고려대 법대로 학교를 옮겼지만 갑종장교가 돼 베트남으로 떠나기 직전 고향에 들러 金씨를 찾을 정도로 우정이 돈독했다.

전장도 아랑곳하지 않고 꼬박꼬박 주고받던 이들의 편지는 그러나 1967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쓴 尹씨의 편지가 마지막. 두달 후 尹씨의 동생이 보낸 편지엔 친구가 전사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만 실려 있었다. 너무나 아까운 친구를 잃은 슬픔에 그는 반년이나 음식을 먹지 못하며 괴로워했다.

이런 가슴앓이의 물꼬를 터준 이가 바로 부인 김춘교(金春嬌.57)씨. 사랑하는 남편이 상심으로 건강을 해칠 것을 염려한 부인은 남편의 애달픔을 헤아려 생면부지인 친구의 부모를 찾기로 한 것.

그러나 이미 행방이 묘연했다. 생각 끝에 그가 어머니.아내와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구 묘소를 찾아 연락을 바란다는 쪽지를 화병에 남기고 돌아서기를 3년째. 마침내 宋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71년의 일이었다.

그의 집에서 보름 동안 宋씨를 모신 것을 시작으로 두달에 한번꼴로 아내.아이들과 함께 안양의 宋씨댁을 찾았다. 宋씨가 중풍으로 드러누운 약 3년간은 1주일에 한번꼴로 다니며 대소변도 받아냈다.

宋씨도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슬하의 자식들보다 그의 아내부터 찾았다. 시도 때도 없이 호박죽을 나르던 아내. 그들에게 부천과 안양은 결코 먼 곳이 아니었다.

金씨는 1남3녀의 외아들. 金씨 부부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와 14년 전 사별할 때까지 조금도 더하고 덜함이 없이 두 분 어머니를 모셨다.

3년 전 宋씨가 세상을 뜨며 열린 영결미사에서 金씨 부부는 어엿한 둘째 상주가 됐다. 30년의 세월은 그들 부부를 宋씨에게는 잃어버린 둘째아들과 며느리로, 4남3녀인 형제들에게는 형.오빠.동생, 그리고 올케.동서로 거듭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대소사도 함께 의논하고 생활의 고민도 서로 털어놓는다. 지금도 宋씨의 기일을 가장 먼저 챙기는 이가 그의 아내다.

9급으로 시작해 6급 주사로 퇴직하기까지 하위 공무원의 넉넉지 않은 살림으로 슬하의 2남1녀를 기른 '보통사람' 金씨 부부가 보여준 이 특별한 사랑. 한 가정에서도 '내 부모''네 부모'를 따지는 요즈음, 이승을 떠난 친구의 몫까지 자청해 극진히 어머니를 모신 金씨 부부의 얘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생에서 쌓은 8천겁의 인연으로 부모-자식이 돼 맞이하는 어버이날의 이 아침, 당신은 부모로서, 또는 자식으로서 어떤 다짐을 하는지.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