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도 힘입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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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와 같이 대화국가 건설의 주도세력은 가야로부터의 이주민이었으나, 대화국가의 기초가 다져지고 고등문화를 건설하는 데는 거의 백제인에 힘입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조(아스까)문화(552∼645년)는 거의 백제인(약90%)과 고구려인(약10%) 에 의한 것이었고, 다음의 백봉(하꾸호)문화(650∼720년)는 통일신라로부터의 영향이 컸다.
앞에서 본 것은 주로 역사학및 고고학적 자료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는 다음에 인류학적·언어학적자료에 의해 일본민족의 기원을 살펴보겠다. 이 분야의 자료는 필자의 전공이 아니므로 다만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종합해 보는 것이다.
인류학적 자료에는 일본민족의 체질적 특징에 의하는 것과 민족학(민속학)적 특징을 대상으로 하는 두방면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학문이 뒤늦게 받아들여져 그 분야의 연구가 뒤떨어졌다. 따라서 인류학적 자료에 의한 일본민족의 기원은 거의 미해결의 상태에 있다.
일본열도의 각지에서 승문시대의 인골이 약 1천체분이상 발견되어 그 시대주민의 인종적 특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됐다. 일찌기 19세기후엽에 승문시대의 인골의 연구에 의해 승문인은 아이누인이라는 설을 낸 학자가 있었다. 필자는 승문토기의 기원이 초기의 하도식 토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시베리아의 선사토기에 있다고 생각하므로 승문인의 일부가 아이누인이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언어나 민족지적자료에는 남방아시아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기 때문에 승문시대에 남방아시아로부터의 어로민의 이동의 물결이 계속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동경대학의 장곡부언인은 승문인의 아이누설에 반대하여 일본민족 중국남부기원설을 주장했다.
즉 그는 승문시대인은 중국남부로부터 왔으며 그 승문시대인이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미생시대인, 고분시대인이 되고 다시 현대일본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민족에 아이누족이나 특히 한국계 민족의 혼혈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려는 것으로 그의 제자 영목상등에 의해 이어받아져 오늘날 대표적인 설이 됐다. 즉 그것은 일본민족이 태고적부터 일본국토에 이르러 발전하고, 다른 민족의 혼혈없이 일본민족이 형성되어 오늘날의 민족 국가를 발달시켰다는 황국주의적 역사관에 가장 부합하는 민족기원론이다.
체질의 특징에 따른 민족기원의 연구에는 방법론상 또는 해석상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방법론상으로는 고인골이나 현대인의 생체의 계측은 그 자료를 될수록 지역적·시대적으로 세분한것이어야 된다. 만약 인골이나 생체의 계측치의 경우 일본열도전체를 지역적 고려없이 하나로 묶어서 평균치를 내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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