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스캔들로 스타일 구긴 유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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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창설 60주년을 앞두고 유엔의 권위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유엔의 '이라크 석유-식량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잇따라 터져 나오는 뇌물 스캔들, 이른바 '오일 게이트' 때문이다. 수그러들던 코피 아난 사무총장 아들의 취직 특혜 논란도 다시 불거져 유엔의 도덕성 시비가 증폭되는 양상이다. 석유-식량 프로그램은 유엔 창설 이래 최대 인도주의 사업이다.

◆ 유엔 고위직 부패=폴 볼커 전 미 연방준비위원회(FRB) 의장이 지휘하는 조사위원회는 8일 석유-식량 프로그램과 관련된 유엔 전.현직 고위인사 두 명의 독직 사건을 공표했다. 프로그램의 총책임자였던 베논 세반 전 사무국장과 알렉산더 야코블레프 유엔 조달담당관이 뒷돈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프로그램을 집행하면서 관련 기업에 이권을 주고 사례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30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발표된 야코블레프 담당관은 과테말라의 안티구아 섬에 은행계좌를 터놓고 2000년부터 입찰 기업과 관련 인사들로부터 송금을 받아온 것으로 밝혀졌다. 유엔은 뉴욕 검찰청의 요청에 따라 야코블레프에 대한 외교관 면책 특권을 박탈했다.CNN은 "뉴욕 검찰이 야코블레프를 소환조사 중"이라고 보도했다.

세반 전 국장은 아프리카.중동계 업체에 석유 매입권을 주고 돈을 받았다. 그는 석유업자들에게서 15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과 계약을 할 무렵 석유업체가 스위스은행에서 인출한 현금이 며칠 후 세반의 계좌로 들어간 사례가 포착됐다. 그는 2월 수뢰 혐의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

◆ 아난 총장 아들의 특혜 취직 시비=아난 총장의 아들 코조가 스위스 업체인 '코데크나 인스펙션 서비시스(Cotecna)'에 들어간 뒤 이 회사가 석유-식량 프로그램 관련 물자 검사업체로 뽑혔다. 아난 총장이 아들 취직을 대가로 독점권을 준 것 아니냐는 시비가 일었다. 3월 조사위가 "아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점은 있으나 부패 혐의는 발견치 못했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면서 아난 퇴진 시비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6월 Cotecna에서 "SG(Secretary General:사무총장) 및 측근들과 간단히 협의했다"는 메모가 발견됨으로써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 확산 일로의 오일 게이트=석유-식량 프로그램은 유엔이 1996년 경제 제재에 따른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을 돕기 위해 시작했다. 이라크 석유를 받고 인도적 물자를 대신 사주는 식이다. 이권 사업이 되면서 부정부패가 끼어들었다.

유엔이 주체인지라 오일 게이트는 단순한 뇌물 사건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은 아난 총장 퇴진을 요구해 왔다. 아난은 이라크 문제를 놓고 미국과 이견을 보여왔다. 안보리 개혁 문제까지 더해져 유엔의 앞날이 당분간 험난할 전망이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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