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명분 찾아 철야토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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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1시간5분간 밤을 새운 마라톤회의 끝에 의·약강제분업 즉각 실시주장에 대해 「일단후퇴」를 결정한 대한약사회의 대의원총회는 후퇴의 명분을 찾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았다.
정부의 강행방침이 확인돼 사실상 이를 따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선택만 남은 상황에서 누구도 선뜻 「후퇴」를 제의하기가 어려워 총회는 자칫 「휴업재개」의 막다른 방향으로까지 진행될 조짐조차 없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시 문을 담는 것은 오히려 발목을 잡힌다는 대의원들의 공통된 생각과 김정비 보사부장관의 직접출석· 설득이라는 성의표시를 일단 「명분」으로 삼아 후퇴를 결정하고 1일 새벽2시25분에야 갑론을박을 끝냈다.
○…김정비 보사부장관이 김영기 사회보험국장을 대동하고 서울 감철동 약공회관5층 약사회대의원 총회장에 나타난 것은 30일하오 9시 정각.
그때까지 보사부의 무성의성토에 울분을 터뜨렸던 대의원들은 김 장관이 들어서자 우뢰같은 박수로 환영, 한가닥의 「뜨거운 기대」를 나타냈다.
사회를 맡은 길병전 대의원총회의장은 『김 장관께서 피곤을 무릅쓰고 밤늦게 여기까지 나와주신데 감사를 드린다』면서 『김 장관은 언제나 서민의 편, 약자의 편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알고있다』고 추켜세우고 『장관님의 건강과 시간관계상』질문은 5∼6명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서면으로 해주도록 당부.
○…김 장관은『그동안 약사회지도자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뵙고 싶었는데 늦었다』고 인사말을 하고는 『이미 결정된 정부방침이니 일단 믿고 따라 줄것』을 거듭 촉구. 『여러분의 보사부, 여러분의 정부이니 한번 믿어달라』고 호소한 김 장관은 모든 문제를 『약사·의사· 사회각계인사가 참여하는 의· 약협업 추진위원회에서 그때그때 검토해 고쳐나가면서 3∼6개월간 시행해본 뒤 결과를 보아 결점을 짓자』고 되풀이 해 설득.
질문이 나올때마다 의·약협업 추진회로 결정을 미루자 나중에는 『협업추진위가 없었다면 어떻게 답변할 뻔 했나』하는 수근거림과 간혹 야유의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취임 한달이 조금지난 김 장관은 실무적인 문제에 부닥치면 김영기 사회보험국장에게 대신 답변토록 하면서 장관과 국장이 7∼8차례나 번갈아 나서 답변.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에 가선 『의· 약협업 추진위에서 논의하자』는 바람에 한마디라도 「확실한 답변」을 기대했던 약사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한 대의원은 마지막에 『장관님께서 우리들에게 물러설 명분을 주십시오』라고까지 매달렸으나 김 장관은 끝내 「협업추진위」로 일관.
○…미리 선정된 5명대표들의 열띤 질문에 장관의 쳇바퀴 도는 답변이 1시간40분동안 진행된 끝에 길 의장이 『장관님께서 우리들의 의사들 충분히 들으셨고 밤늦게 피곤하실테니 이만 뜨거운 박수로 환송하자』고 재의, 매듭을 지었다. 김 장관은 연단에서 내려와 앞줄의 대의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는 제스처로 「정치인」의 면모를 보였다.
박수속에 악수를 끝낸 김 장관은『현재로선 여러분의 박수를 받을 입장이 아닌줄 안다. 그러나 앞으로 받도록 해보겠다』고 여운을 남기고 회의장을 떠났다.
○…김 장관이 자리를 뜨자 회의장은 맥빠진 분위기. 빨리 결론을 짓자는 의장의 독촉에도 선뜻 발언이 없는 가운데 길 의장은『여러분의 심정을 잘 안다. 나라도 별 대안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대의원들의 심중을 대변. 「장관 발언에 무슨 알맹이가 잇었는가. 농락당한 셈이다. 무언가 우리 대책을 확실히 정하자』는 흥분과 울분의 독백만 거듭될 뿐 실질적인 대안의 제시는 없어 회의는 시간만 끌었다.
○…결국 모든 것을 회장단과 시· 도지부장회의에 위임하자는 대책아닌 대책을 만장일치로 결의하면서 대의원들은 울분을 회장단에 터뜨렸다. 와중에 사의를 표한 황원성 회장의 사표를 만장일치로 수리한 대의원들은 황 회장과 함께 사퇴하겠다는 부회장단은 유임토록 결정, 새 회장을 바로 뽐자는 제의까지 나와 세차례의 정회를 거듧, 절충 끝에 김명섭 부회장을 의장대리로 선임하고 새벽 2시25분에 산회.
○…이날 대의원총회는 하오 2시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성원이 늦어져 3시20분에야 개회. 1백83명대의원중에 1백36명이 참석했는데 대구에서온 한 30대대의원은 『대구시의 대의원 12명 가운데 대부분이 보건소· 경찰등의 종용으로 회의장에 못오고 3명만 왔다』고 경위를 밝히기도 했다.
○…서울시의 한 여성 대의원은 『당국은 약사회 입장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시행하려 들지 않느냐』고 반문, 『끝까지 당국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이 자리서 시한부농성을 벌이든지 일제 폐문을 결의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많은 동료대의원들은 발언이 끝나자 박수를 보내며 『치마가 낫다』 『보사부장관을 바꾸자』는 등 농담을 하기도 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약공회관에는 보사부의 약무식품국 과장과 계장등 2명이 나와 시종 지켜봤으며 장관과 함께 온 이창기 약무식품국장· 안택수 대변인등은 새벽2시25분 회의가 끝날때까지 방청, 무사히 총의가 끝나자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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