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①정치] 6. 양김 분열과 3당 합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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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 전 국회의원

1987년 6월항쟁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민주진영은 분열했다. 상도동과 동교동,영남과 호남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12월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 분열과 패배의 한가운데에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지도자가 있었다. 이들은 국민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다. 민주화를 향한 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되돌릴 수 없는 심각한 역사적 잘못이었다.

90년 1월 겨울추위가 막바지 맹위를 떨치던 어느 날, 한 사람이 군부정권의 품안으로 날아갔다. 3당합당이었다. 정통야당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그토록 싸워왔던 군부정권과 한편이 된 것은, 오로지 권력을 향한 욕심과 어떤 방법으로든 또 다른 김씨에게 지지 않겠다는 엉뚱한 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당 야합은 지역분열을 조장하는 것만이 대선승리를 가져다준다는 역설적 정치공학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87년 양김씨의 분열로 시작된 정치세력의 분열은 90년 독재세력과 민주세력을 뒤섞어버리는 정체성 해체를 초래했다. 그리고 기어이 92년 대선을 통해 전 국민의 지역적 분열이라는 파국을 불러왔다. 92년 대선은 향우회장 선거가 되었고 가장 머릿수가 많은 동네의 대표가 국민의 대표가 되었다. 97년의 대선 또한 특정지역의 맹주끼리 연합해 승리를 이끌어 낸 지역동맹의 승리였다. 90년대의 정치와 정치인은 의식있는 이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국민은 지역감정의 포로가 되어 대의보다는 작은 이해를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영남당이니 호남당이니 하는 말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분열과 야합의 역사 중심부에 서 있었던 이들이 남겨둔 얼룩은 언제 씻겨질 수 있을까. 지역주의의 조종(弔鐘)을 기다리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때 중앙일보
3당 합당비밀 ‘내각제 각서’ 특종

1990년 1월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인은 3당합당을 단행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는 3개항의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각서는 꼭꼭 숨었다. 90년 5월 민자당 창당대회 때도 3개항 중 하나만 소개됐다. JP가 “빙산의 일각”이라고 했다. 소중한 단서였다. 빙산을 찾아 잠수했다. 빙산은 내각제 밀약이었다. 5월 31일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YS는 “각서는 없다”고 부인했다.
각서를 찾아 나섰다. 각계파의 실세들을 집으로 사무실로 집요하게 찾아다녔다. 6월 말 각서 사본을 입수했다. 그해 가을 내각제를 놓고 당내 갈등이 재연됐다. 그 무렵 사본을 해설기사에 넣어 실었다. 합당의 본질이 확인됐다. YS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YS는 배수진을 쳤다.당무를 거부하고 정치판을 깰듯이 나왔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박보균 정치담당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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