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개스값 하락과 음모론

미주중앙

입력

전국 평균 개스값이 2010년 12월 이후 처음으로 갤런당 3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개스값이 가장 비싼 곳 중의 하나인 LA도 2.99달러 주유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스값이 얼마나 떨어졌나는 우유, 생수 가격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유는 지난 9월 현재 갤런당 3.73 달러, 생수는 에비앙 기준 갤런당 8.20달러다.

그나마 불경기의 즐거운 소식이 된 최근 개스값 하락은 그러나 이전의 가격 등락 때와는 그 원인이 전혀 다르다. 기억을 조금만 되살리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스값 등락 때마다 정유시설 이야기가 튀어나왔던 것이 생각날 것이다. 정유시설 문제로 가격이 뛰었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조금 내렸다. 정유시설에 문제가 없으면 여름용 개솔린에서 겨울용 개솔린으로 생산이 넘어가면서 여름용 개솔린이 줄어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개스값은 오를 땐 많이, 내릴 땐 조금을 반복하며 4달러대 중반을 맴돌았다.

하지만 이번의 개스값 하락의 원인은 정유사의 생산능력 변화가 아니라 원료인 원유값 하락이다. 2011년 이후 110달러선이었던 원유값은 80달러 초반까지 무너졌다. 폭락이다.

현재의 원유값 하락 원인은 미국의 생산량 급등(지난 6년간 70% 증가)과 유럽과 중국의 경기 둔화, 기존 산유국의 생산량 유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경제 법칙으로 보면 가격이 폭락하면 생산이 줄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지난 9월 하루 생산량을 970만 배럴로 오히려 10만 배럴 늘렸다. 이 때문에 내년 유가가 70달러선까지 떨어진다는 예측이 나오면서 미국과 사우디가 손잡고 원유값을 낮추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 등장한다.

지난 14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은 음모론을 수면 위로 떠올렸다. '또 다른 석유전쟁(A Pump War)'이라는 칼럼에서 그는 최근의 원유가 폭락은 원유생산 1.2위국인 사우디.미국이 손잡고 러시아.이란 목조르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유가를 폭락시켜 국가 재정에서 원유 수출의 비중이 절대적인 러시아.이란을 파산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 음모론은 꼭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최근의 개스값 하락을 설명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실제로 개스값 하락으로 러시아와 이란 경제의 위기론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원유.천연가스 수출의 비중은 3분의 2에 이른다. 경제 전문가들은 러시아 경제가 성장하려면 유가가 배럴당 92달러~93달러는 유지돼야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란은 더 심각할 수 있다. 균형 예산을 편성하려면 배럴당 140달러는 돼야 하는데 현재 유가는 턱없이 낮다. 벌써부터 이란 핵 협상에 저유가가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유가 하락은 원유 시장 점유율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기도 하다. 사우디는 1980년대 중반 유가가 배럴당 35달러에서 10달러대로 추락하자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을 25%로 줄였다가 북해 유전 등 공급이 다변화된 원유 시장의 점유율 경쟁에서 밀렸던 경험이 있다. 이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이번엔 오히려 증산을 택했다. 사우디의 증산은 한편으론 턱밑까지 따라온 미국산 원유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유가 80달러가 계속되면 미국의 셰일가스 붐은 높은 생산 원가로 경쟁력을 잃게 된다.

미국과 러시아까지 가세한 원유 시장은 가격보다 시장 점유율 싸움에 돌입했다. 내년까지 저유가 기조 예측이 나오는 근거다. 쿠웨이트는 이미 저유가의 장기화에 대비해 석유부 장관이 나서서 경제 구조 다변화를 외치고 있다.

국제 원유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경쟁이 지금처럼 계속되면 LA의 개스값이 정말로 2달러 중반대까지 내려갈 지도 모르겠다.

안유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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