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막이 삼킨「이란인질」구출작전 카터정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회고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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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4일은 미국의 이란인질 구출작전이 실패한지 2년이되는 날이다. 당시 백악관국가안보담당 보좌관으로 이 작전계획에 깊숙이 관계했던「즈비그뉴·브레진스키」교수가 18일자 뉴욕타임즈 매거진에 이 특공작전의 내막을 공개했다. 그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미국이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인질을 구출하기위한 특공작전을 벌이기로 최종결정한 것은 인질사건이 발생한지 5개월뒤였지만 인질구출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은 사건발생 직후부터였다.
1979년11월4일 이란 회교과격파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을 점령하고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은 이틀뒤 나는「해럴드·브라운」국방장관에게 전화를해 합삼에 인질구출작전을 짜도록 지시할 것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이틀뒤인 11월8일 합요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백악관상황실에서 내게 작전계획을 브리핑했다.
우리는 공중촬영한 사진을 면밀히 검토한뒤 특수훈련을 받은 특공대를 헬리콥터로대사관구내에 투입시키는작전을 숙의했다. 디사관구내에 투입된 특공대원과 인질들을 한꺼번에 태헤란에서 멀지않은 .활주로를 통해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있었다. 그하나는 납치범들이 인질들을 어느곳에 가두어놓고 있는지를 알수없다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병참이 무척 어렵고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11월10일 나는 국방성을 찾아가 작전수행 방법을 폭넓게 검토했다. 내가 인질구출작전과 함께 이란에 대한 보복군사공격을 동시에 감행할것을 생각하기 시작한것은 바로 이 국방성작전회의때부터였다. 이란에 대한 보복군사공격은 이란에 상당한 피해를주되 대규모 민간인 희생자를 내지않는 범위에서 감행할 생각이었다.
내 생각은 이란에 대한 보복공격을 인질구출작전과 연결시켜 인질구출작전을 전반적인 보복공격의 일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합작전을 짜려한 것은 인질구출작전이 실패할 경우 발표내용의 초점을 보복공격쪽에 맞춰 미국이 당할 굴욕을 줄이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에 앞서 이란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가해 이란이 스스로 인질을 석방하도록 해야할것 같았다. 가강 적절한 군사적압력은 이란의 최대석유수출항인 하리크도를 점렴하고 약간의 공중공격과 함께 해상봉쇄를 감행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12월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침공이후 이란에 대한 이러한 군사행동이 전략적으로 미국에 해롭다는 결론을 나는 내렸다.
그것은 소련에 폐르시아준과 인도양진출을 위한 또하나의 구실을 줄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회교국가들사이에 반소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럴바에는 인질구출 특공작전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질사태이후 몇달동안 우리는 1주일에 여러번, 어떤때는 하루에도 몇번씩 회의를 열고 결과를 태통령에게 보고했다. 내가 주재한 이 회의에는 부통령·국방장관·재무장관·대통령법률고문·백악관대변인·합참의장등이 자주 참석했다.
이외에 「브라운」국방장관, 「존즈」합참의장, 「터너」CIA국장과 그들의수적보좌관 한두명이 참석하는 소대책회의가 내집무실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회의에서는 주로 인질구출작전과 이란에 대한 폭넓은 군사행동계획등이 극비리에 논의되었다.
다음해 2월말 이란에 대한 직접 군사행동을 취하라는 국민과 의회의 압력은 점점 가중되었다.
2윌20일 나는 40명의 의원들과 만났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질석방 협상이 아무런 진전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대해 실망과 좌절감을 표시했다. 나는 그 길로 백악관으로가 의원들의 이러한 불만을 「카터」대통령에게 전달하는 한편 인질구출 작전에 참가할 항공기의 이란안 착륙지점을 찾아보기위해 이란영공 정찰비행을 허락해줄것을 요청했다.
「카터」대통령은 그같은 정찰비행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되면 결국 인질석방협상이 위태로와 질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내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는 사이 인질 구출문제는 더욱 더 긴급성을 띠어가고 있었다.
나는3윌중순 「브라운」국방장관 및 「존스」합참의장과 함께 인질구출계획을 매우 포괄적으로 재검토한끌에 이계획이 어쩌면 희생자가 발생할지 모르지만 성공할가능성이 꽤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인질문제에 관해 우리에게는 3가지의 선택방안이 있었다. 그하나는 이란측이 양보를 할 의사를 보이지 않더라도 무한정 협상을 계속하는것 이었다. 이경우 궁국적으로 미국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수없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두번째 방안은 이란에 대해 응징적인 성적의 군사행동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이란은 인질들을 해치거나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방안은 인질구출특공작전을 감행하는 것 이었다.
여론은 제2의 선택방안을 택하라고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란에 대한 대규모 군사행동이 해결책치고는 가장 좋지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공작전에 의한 인질구출계획이 일종의 필연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카터」대통령이 그같은 계획의 전모를 보고받은 3윌22일의 회의때부터였다.
「브라운」국방장관과 나는 구출작전계획에 모든 정신을 쏟고 있었으나 이 계획은 아직 최선의 대안으로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날은 바람이 무섭게 불던 토요일이었다. 「카터」대통령과 「밴스」「먼데일」 「브라운」 「터너」 「존즈」「파월」 「데이비드·앨런」, 그리고 나를 포함한 백악관보좌관들이 캠프데이비도 대통령별장에서 회동했다.
이란 인질문제가 제일먼저 튀어나왔다. 인질협상은 중대국면까지 와 있었으며 「팔레비」 는 파나마에서의 망명을 마치고 이집트로 막 떠나려할 참이었다.
외교전략을 토의하던 마지막에 「존즈」합참의장은 태통령에게 인질구출작전계획을 브리핑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 모두 협상이 성공할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않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밴슨」장관은 이 자리에서 이란에 대한 어떠한 강압적인 조치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카터」대통령은 일말의 초조함도 감추지 못한채 연말까지 그냥 앉아서 인질들의 억류상태를 그대로 보겠느냐고 다그쳤다. 「카터」대통령은 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우방들이 현재까지는 매우 소심한 자세를 보이고 있으나 우리가 이란해상 봉쇄와 같은 위험한 군사행동을 계획하고 있음을 인식할 경우 보다 적극적으로 대이란 경제제재 조치에 가담해 줄것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과연 4월들어 우방들은 집단제재초치를 취하자는 우리의 호소에 보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카터」대통령은 이때 폐르시아사막을 작전지역으로하는 인질구출작전에 앞서 이란에대한경찰비행을허가했다.【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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