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뺏고 휴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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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술적 후퇴의 필요성과 유효성에 대해서는 중공에 지원군을 요청하러갔던 박헌영·이상조·유성철·이유민등에게 모택동이 충고한 바도있다.
김일성은 그러한 충고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언제나 「불의의 기습」 .「불의의 공격」 이라는 전술만이 있었다. 이는 그가 항일 빨치산시절의 전투과정과 6·25도발의 초기단계에서 적용한 유일의 전술이었다.
53년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의 일이다. 그무렵 판문점에서는 군사분계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의견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문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기위해 김일성·팽덕회 (중공지원군사령관)·「라즈바예프」(소련대사겸 수석군사고문)의 3자회담이 열렸다. 김일성은 이 회담에서 새로운 안을 내놓았다. 휴전은 하되 서울을 점령한 후에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팽덕회는 김일성의 제의에 반대했다. 「라즈바에프」는 기본적으로는 김일성의 의견에 동의하는 태도였으나 본국(소련)정부에 물어보겠다고만 말했다.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 좋다고만 우길뿐 어떤 정치적·군사적논거를 내놓지는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팽덕회의 반론은 논리가 섰다.
그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현군사정세로 보아 서울을 점령하는데는 약6만명의 인명손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인명으로 도박을 할수없다.
▲전선이나 서울까지 밀고 가기 위해서는 많은 포탄과 무기등의 군사물자를 보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공군의 공습이 끊이지 않는 상황하에서 전선과 후방과의 정상적인 연계를 보장하기는 곤란하다.
▲상대방은 서울을 상실한 상태에서 휴전협정을 맺으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중공당과 정부는 현시점에서 서울점령작전을 실행할 필요를 느끼지않고 있다. 그러나 북괴측이 자신의 힘으로 서울을 점령하겠다고 한다면 굳이 반대는 하지 않겠다. 그 경우 우리들은 후방을 책임지겠다.
이같은 토의가 있고난 며칠후「라즈바예프」는 소련정부로부터『팽덕회는 탁월한 군사전략가다. 동무는 간섭하지 말라』는 전문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김일성의 서울점령의 꿈은 깨어졌다.
중공군의 참전에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한 사전약속 같은 것은 없었다. 더우기 전쟁개시에 대한 사전동의같은 것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80년8∼10월사이 박헌영 (부수상겸외상·북괴정치총국장), 유성철 (부참모장겸 작전국장),이상조(부총참모장겸 정찰국장·군사위원회대표)등이 몇차례 북경을 방문하여 모택동·주덕·유소기·주은래·고강·팽덕회·섭검영등 중공지도자들과 군사원조 파병문제를 토의한 일이 있다.
이시기인 50년8월∼9월초 전선은 비교적 좋은상황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전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북괴대표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유성철 작전국장의 전황보고를 듣고는 우려를 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북괴군이 적을 남해까지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적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그들은 굳게 결속할 것이다. 결속한 적을 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럴 경우 당신네들은 어느정도 후퇴를 하면서 적의 결속을 풀어놓아야 한다. 지금은 전술적 견지에서 공격보다는 퇴각이 유리한 시점이다.
당신들의 상대는 그리 쉬운적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와 후퇴의 가능성을 심각히 검토해야 한다.』
북괴대표들은 이러한 모택동의 충고를 김일성에게 전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우리군이 최후의 결전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판에 모택동의 퇴각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무시해버렸다.
중공의 지원군 파병문제는 주은내가 소련을 방문,「스탈린」과 회담을 가진뒤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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