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차의 달인' 여연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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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차인(茶人)들에게 요즘은 대목이다. 한 해 동안 쓸 차 양식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를 만드는 일은 추운 겨울을 견뎌낸 차나무의 생명력을 고스란히 갈무리하는 작업. 농사 기간이라야 햇순이 터져 나오는 곡우(穀雨)부터 입하(立夏)까지 고작 보름 남짓이어서 분주하기 짝이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차의 달인'으로 전통 차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는 여연(如然.55.전남 해남 대둔사 일지암 주지)스님도 사정은 마찬가지.

땅끝에 있는 일지암으로 그를 찾으니 아니나 다를까 손은 퍼렇고 몸에서 풍기느니 차 잎 냄새뿐이다. 느닷없이 차가 뭐냐고 물으니 "내가 절 살림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처님이 내 삶에 있어 전부이듯 차(茶)도 그저 나의 일상성일 뿐"이라고 내지른다.

밥 먹고 차 마시고, 한가하면 차 마시고 한다는 얘기다. 그를 두고 세간에선 종종 이 땅의 차문화 중흥조인 초의(草衣.1786~1866)선사를 닮았다고들 한다.

단순히 선사가 말년에 주석하며 다산(茶山).추사(秋史) 등과 교류하던 일지암의 주지라서가 아니다. 그만큼 차에 대한 일정한 경지는 물론 플러스 알파가 있다는 인정이다. 하지만 그는 유난을 떨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얘기는 쉽다.

내친 김에 다도(茶道)인지 뭔지 때문에 어디 차를 마시겠냐고 비트니 대번 그의 식대로다.

"그거 골치 아플 게 하나도 없어요. 그저 밥상을 차리고, 먹듯이 하면 됩니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릴 때 아무렇게나 합디까. 온갖 정성을 다해 정갈하면서도 맛있게 차려 내잖아요. 그런데 사돈이 오면 식구들끼리 먹을 때보다 상이며, 그릇이며 좀더 신경을 쓰죠. 차를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다도라고 다를 게 하나 없습니다."

그는 다반사(茶飯事)란 말의 유래를 곁들이며 설명 끝에 형식에 치우친 차 문화의 세태에 대해 혀를 찬다.

"차를 내고, 마시고 하는 데 정신은 쏙 빼놓고 절차만 번거로우니…, 차에 대한 거부감만 생기게 됩니다. 오히려 차 문화를 죽이는 꼴이죠."

그는 '화경청적'이니 '정행검덕'이니 하는 차 정신이란 한마디로 마음을 가다듬어 자신을 돌아보고, 궁극적으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선 차를 만들고, 갈무리하고, 끓여내고, 마시는 행위마다 온갖 정성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차의 효용성에 대해선 '하늘과 사람이 모두 애지중지(天仙人鬼俱愛重)'할 정도인 만큼 어느 한 과정도 소홀히 했다간 그 아취(雅趣)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성 육우(陸羽)는 차의 아홉 가지 어려움을 얘기했지만 초의선사께선 무려 22가지 절목에 걸쳐 가르침을 남기셨을 정도입니다. 물을 뜸들이는 대목만 해도 정말 기가 막힙니다. 어느 한 가지 선(禪)의 경지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차 문화도 생활의 한 부분이란 점에서 반드시 모든 걸 옛 방식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형편대로 석간수 대신 수돗물을 걸러 숯불 대신 커피포트에 차를 끓이더라도 그 마음 씀씀이만은 제대로 할 때 그게 바로 올바른 다도라는 것이다.

사실 그도 1971년 연세대 졸업 후 출가했을 때만 해도 차에 관한 한 까막눈이었다. 한약재로 알고 두 통을 한꺼번에 달여 대선배 스님한테 바쳤다가 혼찌검이 났을 정도였다.

이듬해 당대 최고의 다인이던 사천 다솔사의 효당스님을 찾아 차를 배우면서 문헌공부와 함께 76년부터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77년 국내 최초로 결성된 '다도회'의 간사에 이어 78년 한국차인연합회 고문으로 일지암 복원에 간여하는가 하면 대학의 차 동아리를 중심으로 차 문화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IMF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는 것을 보고 은근과 끈기가 사라진 걸 확인했습니다. 차를 통해 전통의 정신과 가치를 회복시키고자 노력 중입니다."

91년 일지암 주지가 된 뒤 98년 '초의차문화연구원'을 차린 이유다. 지금까지 2백여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그는 요즘도 매달 보름 이상을 차 강의를 위해 서울 등 전국으로 출타한다. 그리고 강조한다. 술 마시는 나라는 망하고 차 마시는 나라는 흥하노라고.

글= 이만훈 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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