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평화공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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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참모장을 대동하지 않은것은 총사령부와의 연락이 있을까 해서였다.
김웅이 무사히 지휘소에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황참모장을 「위험한 놈」 「상관을 믿지 않는 놈」으로 몰아 그날자로 제1군참모장직에서 해임했다. 이렇게 해서 제l군은 참모장없이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6·25전쟁작전계획을 언급할때 웃어넘길 수없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것은 이 작전계획이 서울점령까지만을 계산하여 작성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것은 준비기간이 부족해서나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김일성자신이 그이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이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이나 남한측이 그렇게 큰 경계심을 느끼지 않고 안이한 정세판단을 하고 있었으며 또 하나는 북괴측이 평화공세로 남한측을 혼란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실례를 들어보자. 우선 50년6월9일「무초」주한 미대사가 국방장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전문이 있다.『평양방송은 6월7일, 49년도와 같은식의 새로운 선전공세를 개시했다.「민주전선」은 미국과 이승만경찰국가에 의한 한국분단상태를 개탄하면서 애국정당과 단체들이 8월15일 해방일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제안했다.』
같은날 또 한통의 전보가 「무초」대사로부터 국방징관앞으로 보내져왔다.
『…「민주전선」의 제의는 정치적행위에서 보면, 5·30선거가 결과적으로 성공하고 북한이 그것을 좌절시키는데 실패한 것은 그들의 허약점을 폭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현재 한국정부의 안정성을 파괴할 정도의 게릴라를 침투시킬 능력이 없으므로 이 제의는 다분히 이에대한 대안으로 나온것 같다.
그러나 선전행위에서 보면 이는 이니셔티브를 잡는것이 된다. 표면적으로는 그 제의는 38선철폐를 갈망하는 남한의 상당수여론에 호응하는 내용이다.】
주한미국대사는 또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에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①북한은 5·30선거를 좌절시키는데에 실패함으로써 자신의 허약점을 드러냈다.
②북한은 현재 한국정부의 안정성을 파괴할 만한 게릴라침투능력이 없다. 따라서 이 호소문은 그 대안이다.
③선거일과 첫회의날자가 특정일로 지정돼 있다고 하는것은 정상적인 판단이 결여된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게릴라 활동의 편리한 구실로 이용될 수도 있다.
이처럼 주한미국대사는 북한 「민주전선」의 제의가 구체성이 없고 현실적이 아니기 때문에 일종의 정치적효과를 노린 선전공세로 보았다.
엄밀히 말해 북괴의 제의는 전형적인 선전공세류의 범위를 넘고 있었다. 적의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기위한 술책이고 전쟁준비를 은폐하기 위한 전술적 책략이었다. 실제 이 제의를 방송함으로써 북한측은 주한미국대사로 하여금 북한측이 전면전쟁이나 게릴라를 남한에 침투시킬 능력조차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는것처럼 느끼게 하는데 성공했다.`
남한이나 미국만이 아니라 북한주민들에게도 이 제의는 큰 역할을했다. 전쟁이 발발했을때 많은 북한주민들은 남한측이 북한측의 제의에 대포알로 응답했다는 북괴의 허위선전을 그대로 믿었다.
전쟁개시에 대한 비밀은 철저히 지켜졌다. 남한이나 미국측은 북괴군의 38선집결이나 이동에 신경을 쓰고는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설령 어떤 형태의충돌사건이 발생한다해도 그범위나 규모가 전면전쟁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50년6월22일 한국군 옹진연대 사령부는『38선북방 약4㎞지점에서…군사행동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유엔한국위원단은 첩보에 따르면 『침략이 절박하다』고 하면서도 『충분히 믿을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I·F·스톤」『비사한국전쟁』 신평논사 .동경·52년)
50년3월10일 미극동군사령관의「종합주간정보」에는『북괴군은 50년6월에 남침개시를 예정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고 기록돼 있는데, 동시에 다른 부분에서는 『우리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주석을 붙이고 있었다 (전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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