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라인강의 기적」|게르만의 질서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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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게르만은 사랑이나 유머가 없다. 가진 것이라곤 질서뿐이다.-
지난해 프랑스의 여류정치가「시몬·베이유」(유럽의회의장)가 독일사람들을 이렇게 꼬집었을 때 서독에선 의외에도 정확한 표현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베이유」의 표현을 한풀 벗기면 사랑이나 유머가 프랑스 사람의 특성이고, 게르만 기길의 특징은 질서라는 뜻이다.
서독사람의 질서의식은 유럽의 어느 민족보다도 철저하다. 두 사람뿐이라도 줄을 서 버스에 오른다.
고장난 교통신호대 앞에서 몇 십분씩 기다렸다며 빨리 고장수리를 하라고 호통을 치는 독자투고가 신문에 심심치 않게 실린다.
새 자동차를 구입하고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여기저기 부딪쳐 중고차로 만들어 버리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서독사람들은 중고차라도 새차처럼 깨끗이 관리한다.
연간 인플레가 거의 8%에 육박하는 서독에서 자동차 보험료만은5%에 그치며 사고가 나도 어렵지 않게 보험료를 타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사고율이 영·불의 3분의l에 불과한 질서의식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서독의 뉘른베르크 경기장과 영국의 커벤트리경기장에서 두 나라 국민성의 차이가 발견된다.
관중 수용능력이 비슷한 수준의 이두 경기장은 우선 종업원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뉘론베르크는 매표원과 경비원이 고작 2백명 안팎인데 반해 커벤트리경기장은 서독의 두 배인 4백여명. 경비원숫자에 차이가 나는 것은 몰래 경기장에 들어가는 불법 입장자의 수가 영국이 서독보다 많기 때문이다.
게임도중 경기장에 버려진 쓰레기더미는 뉘른베르크가 트럭 2대 분인데 반해 커벤트리는 4대분이나 된다. 양 국간의 질서를 저울질할 수 있는 한 보기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의식도 전후세대의 성장과 함께 서서히 퇴색 돼가고 있다.
80년12윌 서독 제2TV (ZDF)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ZDF-TV는 이날 「라이너· 가이슬러」기민당 (CDU)사무총장등 5명의 정치가를 공개홀로 초청해「법과 질서」란 대용의 토론을 방영했다.
「가이슬러」총장이 관중석의 한 히피풍의 청년으로부터『엘살바도르에서도 질서를 지켜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정부가 설령 잘못을 저지른다해도 질서를 지켜야 한다.』 「가이슬러」의 대답이 끝나기 바쁘게 좌파로 보이는 20대 청년들이 단상으로 우르르 몰려나와「가이슬러」총장에게 발언 취소를 요구하며 삿대질을 했다.
「가이슬러」총장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고 청년들은 『이 친구는 안 되겠군』하면서 위협을 계속했다. 토론은 다섯 차례나 중단됐다. 이런 모습이 텔리비전 화면에 그대로 중계됐다.
서독인의 질서의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보인 사건이었다. 골목이라도 붉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간 적이 없다는 초대의 한 나치장교출신이 이TV소동을 보고 혀를 내둘렸다.
한 사람의 생각이 비뚤어지면 가정이 망하고, 두 사람이 비뚤어지면 나라가 망한다는 독일의 속담이 바로 질서를 강조하고있다.
서독의 한 사회학자는 전통적 대가족제도에서 질서의식이 싹텄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게르만을 시샘하는 많은 다른 민족들은 나치시대의 전체주의가 질서를 강요했다고 주장한다. 한 영국인은 고층아파트에 사는 할 일 없는 전쟁과부들이 하루종일 거리를 내려다 보고 있어 교통신호쯤은 지켜주어야 한다고 비꼰다. 체질화된 게르만의 질서의식도 점차 퇴색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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