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29.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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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필자(앞줄 오른쪽)가 다섯 살 때 누나, 큰형(뒷줄 오른쪽), 큰형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1952년 봄이었다. 나는 여자 대원들을 데리고 안동에서 부산으로 갔다. 분장에 필요한 소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국제시장을 뒤져 간신히 화장품을 구했다. 대원들은 먼저 숙소로 갔다.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혹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우연히 만난 고향 사람한테서 받아둔 큰형의 주소였다.

영주동 고개를 지났다. 피란민들의 판잣집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었다. 물어 물어 집을 찾은 나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창순아!" 누가 내 본명을 불렀다. 아버지였다. 생사도 몰랐던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야, 창순아!" 뒤에서 큰형도 뛰어나왔다. "이 자식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아버지께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는 "나는 절 받을 자격도 없는 몸인데…"라며 한숨을 쉬셨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양구 읍내에 소실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내겐 아버지와 함께 지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가 부산으로 온 것도 불과 두 달 전이라고 했다. 춘천에서 부산까지 아버진 홀로 피란왔다고 했다. "1.4 후퇴 때 너희 서모를 먼저 피란 보냈지. 그리고 춘천에 갔더니 네 어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더구나." 어머닌 피란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집을 지켜야 한다며 큰 애 부산 주소만 적어 주더구나."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더라고 했다. 지금은 생사도 모르는 처지였다.

저녁을 먹고 아버진 고생담을 늘어놓았다. 열차 지붕에 함께 탔던 피란민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은 일, 피란길에 부모의 손을 놓친 아이들, 폭격이 있을 때마다 집채 높이로 쌓이던 시신들, 또 양말과 발바닥이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고생했다는 얘기도 했다. 양말 안에다 두껍게 비누칠을 하면 발이 부르트지 않는다는 어느 피란민 얘길 곧이 들었던 것이다.

큰형의 살림살이는 괜찮은 편이었다. 일본인 건설회사에서 일한 경력으로 토건 사업에 몸담고 있었다. 부산에선 그래도 실력있는 업자로 통한다고 했다. 먹고 살기엔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당시 부산에는 등화관제가 없었다. 제공권은 미군이 꽉 잡고 있었다. 그래서 밤에 담요로 창문을 가릴 필요도 없었다. 백열등 아래서 삼부자는 간만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때 괘종시계가 밤 10시를 알렸다. 깜빡했던 여자 대원들이 생각났다. 아버지와 형은 한사코 자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대원들을 인솔한 책임이 나한테 있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나는 대문을 나섰다.

대원들의 숙소는 군 휴양소였다. 나는 증명서를 내보인 뒤 여자 대원들의 방으로 갔다. 어수선한 시절이라 두 눈으로 안부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살며시 문을 열었다. "다들 잡니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나는 침대를 죽 둘러봤다. 서지숙만 자지 않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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