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촬영" 전화에 제 발 저린 공직자들 53명 1억여원 뜯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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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당신이 여자와 여관에 들어가는 것을 몰래 촬영했다."

대전 모 구청 과장(5급) A씨는 지난달 12일 근무 도중 정체불명의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이 남자는 A씨에게 "200만원을 주지 않으면 촬영내용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한 뒤 계좌번호를 알려주었다.

A씨는 곧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200만원을 입금했다. 실제 촬영했는지와 상관없이 좋지 않은 소문이 나면 공직자 신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해 송금했다는 것이 A씨의 변명이었다.

충남 논산 경찰서는 10일 공무원과 공기업 간부 등 1000여 명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1억3000만원을 뜯어낸 혐의(공갈)로 김모(49.무직.광주시 서구)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는 2002년 공무원 30명을 협박, 3700여만원을 갈취한 혐의로 구속돼 1년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 2003년 8월 출소했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지 못해 생계가 어렵게 되자 과거 수법을 다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지난해 1월 전국을 돌며 전화번호부 30여 권을 모은 뒤 자치단체와 중앙부처의 공무원, 공기업 간부 등 1068명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정리했다. 그러고 지난달 말까지 1년5개월 동안 하루 20~30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실적'은 괜찮았다. 53명이 100만~500만원씩 입금했다. 돈을 보낸 사람은 ▶정부 중앙부처의 외청 간부▶모 기초자치단체 국장과 과장▶모 구청 과장 등 4~5급 공무원▶정부 투자기관 간부▶자치단체 산하 농산물 도매시장 관계자 등이었다.

김씨는 전화받은 사람이 무시하면 범행을 포기했다. 그러나 "돈이 별로 없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반응을 보이면 물고 늘어졌다. "형편이 어렵다"고 사정하면 깎아주기도 했다.

김씨는 논산 지역 한 기관장이 계좌번호를 메모해 놓았다가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꼬리가 잡혔다.

그는 "품위 유지에 신경 쓰는 공직자들이어서 협박이 쉽게 먹혀들었다"며 "돈은 유흥비 등으로 썼다"고 경찰에서 밝혔다.

논산=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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