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핵폐기 방안 첫 공개천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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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베이징(北京) 3자회담에서 미국에 던진 핵 문제 해법의 요체는 북.미 간 빅딜이다. 미국이 대북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정상화 등의 조치를 취하면 북한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폐기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핵 문제 해결의 조건으로 내세운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넘어 대미 관계의 전면적 개선을 통해 적극적으로 체제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는 의지가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이번 제안은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의 재판(再版)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풀이다. 제네바 합의는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이 북한과 정치.경제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수로 제공을 주선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일각에서 북한의 제안 내용에 대해 "새로운 것이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북한의 요구사항이 제네바 합의와 상당수 겹치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이 특히 북.미 간 일괄 타결을 전제로 했지만 핵 개발 계획의 폐기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점은 고무적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핵 문제 해결"이나 "안보상의 우려 해소"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핵 폐기에 대해 명시적으로 밝힌 점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이런 입장은 북한이 핵무기 보유와 핵 재처리 실시를 밝혔음에도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 가능성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 미국 행정부는 "북한의 제안을 검토할 것"이라며 핵 문제를 평화적.외교적으로 해결한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의 북한 핵 문제 논의 입장을 시사하면서 대북 제재 언급을 자제하는 것도 한 맥락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도 북한의 제안을 일정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일본 외교소식통은 "이번 3자회담은 북한의 핵 보유 시인이라는 한쪽 면만 보면 회담 전체를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면서 "북한의 제안은 핵 보유와 핵 재처리라는 배수의 진을 치면서 내놓은 대타협안의 성격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북한이 3자회담 석상에서 내놓은 일괄타결안과 그 후 만찬석상에서 나온 핵 보유 발언을 짜맞춰야 회담의 전모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북한이 상황 악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3자회담은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3국 정부가 "회담이 결렬되지 않았다"고 한 것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3자회담의 후속 회담은 다음달 14일의 한.미 정상회담 이후 열릴 가능성이 크다. 이번 3자회담에서 나온 북한의 제안 내용과 핵 보유 발언에 대한 한.미.일 3국간 협의를 거쳐 한.미 정상회담에서 대응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과 관련해선 변수도 없지 않다. 미국 내 강경파가 북한의 타협안보다는 핵 보유나 핵 재처리 문제를 들어 외교적 해결 움직임에 제동을 걸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일괄타결안에 미국의 우려사항인 미사일이나 재래식 전력 등의 문제가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점도 지켜봐야할 사안이다. 미국은 핵.미사일.재래식 전력 등을 포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오영환 기자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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