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6)제76화 화맥인맥(25)|월전 자우성|여성모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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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금은 미술대학에서 모델이 필요하면 신문에 광고 한번만 내면 이내 해결할 수 있지만, 내가 선전에 작품을 낼 때만 해도 모델 구하기가 어려웠다
동양화는 누드모델이 아닌 옷을 입은 코스튬인 데도 이해부족으로 모델이 되기를 꺼렸다.
자기얼굴과 똑같이 그려서 광고라도 할양이면 혼인 줄이 막힌다고 생각했던지 여염집 아가씨는 누구라도 모델서기를 두려워했다.
그래 그때는 고작 모델 설 사람을 찾는다는 게 권 번에 출입하는 기녀밖에 없었다.
내가 37년 16회 선전에 입선한『증무도』를 그릴 때는 증무 출 줄 아는 사람을 찾느라 진땀을 뺐다.
요즘 같으면 무용을 전공하는 여대생에게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을 가지고 그때는 모델 때문에 고민 고민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모델을 써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래도 춤추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여자를 찾느라 무진 애를 썼다.
장안의 멋쟁이로 소문이 난 무허(정해창)에게 부탁해서 증무를 출 줄 아는 기녀를 찾았다.
무허는 현초(이유태)의 고종형인데 나와도 잘 아는 터였다.
그는 중국 옥새를 각한 성재(김태석)의 제자로 서예와 전각에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자기 집인 종로4가 원기약방(문교건재상) 2층에 서 실을 꾸미고 여기서 글씨도 쓰고 전각도 했다. 무허는 매양 두루마기를 입고 걸어서 종로 통을 지나 화신 앞·남대문·명동의 다방 가를 산책한 한량이었다.
그의 단골다방은 영화배우 김련실이 경영하던 소공동 입구의 낙랑다방이었는데, 명치 정 (지금 명동)에 있던 성림·백룡 다방도 잘 다녔다. 무허는 다방순회가 취미라고 할 정도로 하루도 다방 출입을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내가 현초와 함께 집에라도 놀러 가면 어디서 구 해다 두었는지 브라질 코피를 끓여 내놓고는 차 맛에 대해 강의라도 하는 것처럼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무허는 서양화가 박상진과 단짝이었는데 다방이고 요정이고 바늘에 실처럼 붙어 다니면서 놀았다.
무허의 소개장을 가지고 내가 차옥정(지금 다동)에 있는 조선 권번 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벌써 무허의 연락을 받고 물색해 두었다면서 권부용이란 기생을 데리고 나왔다.
부용은 얼굴보다는 몸매가 좋았다. 매일 2시간씩 시간을 내주기로 해 놓고는 빠지는 날이 많아서 애를 먹었다.
한참 열이 올라서 열심히 그리는데 정작 모델이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아 시쳇말로 스팀아웃아 되기도 했다.
일이 있어 못 간다고 기별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이제나저제나 하고 까막 까막 기다리다 하루해를 그냥 넘긴 일도 있다.
41년 20회 선전에 특선, 총독 상을 받은『푸른 전복』을 그릴 때도 민산홍이란 기녀를 모델로 썼다.
명륜동4가에 있던 광명 관이란 일본 하숙집 2층 8조 다다미방을 쓸 때었다.
『증무』를 그릴 때 모델(권부용)때문에 애먹은 일도 있고 해서 산홍에게는 처음부터 단단히 약조를 했다.
시간은 아무 때나 좋으니 1주일만 계속해서 나와 달라고….
산홍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줘 그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되었다.
이 때는 모델보다 소품을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한복 입은 여성이 전복을 입고, 벙거지 쓰고, 부채를 펴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인데 벙거지 구하기가 꽤 힘들었다. 포교들이 쓰던 벙거지를 무당 집에서 돈을 주고 빌어 왔다.
산홍은 예쁘지는 않았지만 훤하게 생긴 여자였다.
『푸른 전복』이 특선에 뽑혔다고 신문발표가 나던 날은 산홍이 일부러 내 하숙집인 광명 관까지 찾아와 나보다 더 좋아했다. 마치 모델인 자기가 상이라도 탄 것 같은 기분으로 모델선 보람을 느낀다면서 나를 축하해 줬다.
이당(김은호)선생이 1939년 남원 광한루에 있는 춘향사당에 모실 춘향의 초상을 그릴 때도 조선 권 번에 나가던 소녀 기 김명애를 모델로 삼았다.
김명애는 국악원장을 역임한 함화진씨 소실의 딸이어서 명성도 있었고 가야금 솜씨도 좋았다.
이 무렵은 서양화가들도 모델 구하기가 힘들어 애인을 모델로 작품을 제작한 경우가 많다. 그래 해마다 선전에 똑같은 얼굴이 출품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서양화가 김인승씨가 선전에 출품한 고궁을 배경으로 버드나무가 우거진 길을 한복 입은 두 여인이 걸어오는 그림은 자기부인을 모델로 한 것인데도, 외국작품에 이런 형태의 그림이었었다고 꼬집음을 당했다.
내가 43년 22회 선전에 특선, 창덕궁 상을 받은『화실』은 집사람(유이정)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게 내 카고,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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