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를 추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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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R형!
형과 나는 같은 시대에 태어나 50년 가까운 연륜을 쌓는동안 무수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같이 경험해 온 역사의 같은 증인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학문적 깊이에 있어서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률 헤아려 그 앞날을 예측하고 처방하는 혜지면에 있어 형과 내가 같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는 무례를 범해 본일이 없습니다. 형과 나의 관계룰 요즈음 말로 규정한다면 스타와 팬의 관계라 해두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R형!
얼마전 「플라톤」을 읽다가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한구절이 머릿속에서 묘하게 체증을 빚는 이상현상을 경험한일이 있읍니다. 그 구절이란 『공화국(Republic)에서 배우를 추방해야한다』고 한 대목입니다.
꾸며진 이야기를 무대위에서 벌이는 연극이나 그 꾸며진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역할을 수행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배우를 「플라톤」이 미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배우를 추방하라고한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R형!
나는 요즘 참으로 명배우가 많은 세상이구나하고 감탄하는 일이 많습니다. 배우란 맡은바 역할을 무대위에서만 성실히 수행하면 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무대위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 법률적 책임은 물론이고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읍니다.
역할에 대한 책임면에서 배우와 사회성원은 전혀 다르다고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배우는 역할 수행상의 책임에서 처음부터 면제돼 있지만 사회성원은 역할수행을 함에 있어 언제나 무한책임을 져야 하기때문입니다.
R형!
한 사회의 성원중에 배우와같이 역할수행에 따르는 책임에서 면책된 사람이 많다고 한다면 사회윤리는 그만큼 문란하다는 뜻이 아니겠읍니까? 사회질서와 사회윤리를 확립하려면 모두가 맡은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한다고 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사회적역할,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사회적 역할, 경제인은 경제인으로서의 역할, 교수는 교수로서의 역할, 그리고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사회윤리가 확립될수 있다는 뜻입니다.
R형!
사회윤리의 확립과 더불어 전문주의(프러페셔널리즘)의 확립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형의 주장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사회는 기능화되어 가는데도 역할에 대한 윤리의식이 없어 남의 역할까지 무책임하게 범하는 월권행위자가 늘어나고 있읍니다.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면서도 그사람의 전공영역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전문주의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R형!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적은 세상이라 가슴이 답답해지면 형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앞으로 형을 만날 기회가 과거에 비해 늘어나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 언제나 건강하시고 계속해서 형의 학문적 체취룰 느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상회<연세대교수>
▲1935년 대구생▲서울대문리대졸업▲하와이대학 대학원(석사) ▲연세대학교대학윈 (신문방송학박사) ▲스탠퍼드대학커뮤니케이션연구소객원연구원▲저서 『TV인간론』『매스커뮤니케이션과 사회화』『방송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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