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영의 명작 속 사회학] <44> 귀뚜라미가 된 효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러스트=홍주연

가을이 되니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집 고양이가 귀뚜라미를 잡아오니 ‘귀뚜라미가 된 효자’란 중국 동화가 생각났다. 옛날 중국 명나라에 귀뚜라미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황제가 있었다. 황제는 백성들에게 힘센 귀뚜라미를 바치라고 명령했다. 귀뚜라미를 못 잡으면 많은 돈을 바쳐야 했다. 어느 마을에 사는 성 선생은 귀뚜라미를 잡지 못해 날로 가난해졌다.

돈이 떨어지자 관청에 잡혀가 매까지 맞았다. 드디어 큰 귀뚜라미를 한 마리 잡았건만, 아홉 살 아들이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 꾸중을 들은 아이는 울면서 우물에 몸을 던졌다. 다행히 살려낸 아이는 이상하게도 잠만 잤다. 성 선생은 그 사이 나타난 작은 귀뚜라미를 잡아 바쳤다. 작은 귀뚜라미는 뜻밖에 연전연승을 거듭, 마침내 황제 앞에서도 싸워 이겼다. 황제는 매우 기뻐하며 큰 상을 내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잠만 자던 아들이 깨어나 말했다. “아버지, 저는 그동안 귀뚜라미가 되어 있었어요! ”

귀뚜라미 수컷끼리 싸움을 붙이고 구경하는 귀뚜라미 싸움은 ‘투실(鬪)’이라 불린다. 당나라 궁궐에서 시작해 역사가 1200여 년이나 된 민속놀이다. 이는 전문 투기장에서 열리는데, 귀뚜라미가 뛰어넘지 못하게 둘레 50㎝ 정도 높이의 통을 경기장으로 삼아 가운데를 판자로 막고 양쪽에 한 마리씩 넣는다. 싸움 전에 주인들은 자신의 귀뚜라미 머리를 작은 붓으로 간질여 약을 올린다. 심판이 판자를 빼면 잔뜩 약이 오른 두 마리는 싸움을 시작한다. 보통 5분이면 끝난다고 한다. 명나라 때 크게 유행했는데, 궁중에서 필요한 귀뚜라미를 잡아 바치느라 백성들은 고통을 겪었다. 민간에도 퍼져 일부에서는 과도한 금액을 걸고 도박까지 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귀뚜라미 싸움을 좋아했다. 귀뚜라미에 ‘관우’ ‘장비’처럼 인기 많은 명장들의 이름을 붙이고 애지중지 키웠다. 운동선수처럼 체급에 따라 몸무게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몸에 좋은 먹이를 골라 먹였다. 심지어 사람 피를 빤 모기를 먹여야 힘이 세진다는 속설 때문에 일부러 모기를 잡아 자신의 피를 빨게 한 다음 먹이기도 했다. 중국의 전통문화가 말살된 문화대혁명 때에도 귀뚜라미 싸움은 명맥이 이어졌다. 쿵푸처럼 유파도 여러 갈래며 지금도 중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대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베이징·난징·상하이 등 중국 대도시의 전통 시장에는 귀뚜라미 시장이 있다. 귀뚜라미와 귀뚜라미 통은 물론, 콩알만한 귀뚜라미용 도자기 밥그릇까지 판다고 한다.

찾아 보니, ‘귀뚜라미가 된 효자’ 이야기는 중국 청나라 초기의 문관 포송령이 지은 단편 소설집인 『요재지이(聊齋志異)』에 실린 ‘촉직’ 편이었다. 촉직(促織)은 귀뚜라미를 의미한다. 촉직 편은 ‘선덕 연간에(宣德間)’로 시작하는데, 이는 명나라 선덕제 시절을 가리킨다. 귀뚜라미 싸움에 지나치게 열광한 그를 사람들은 ‘촉직천자’라고 비꼬아 불렀다. 그렇다면 지은이는 황제의 놀이 때문에 고생하는 중국 백성의 아픔을 담아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어린 시절에 읽은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어른이 된 후 잊어서는 안 된다. ‘귀뚜라미가 된 효자’ 이야기만 보더라도 겉으로는 아이의 효심을 내세워 당시 지배층의 감시를 피하고, 지배계급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 민중을 희생시키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백마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저자, 역사에세이 작가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