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 미풍을 팔아먹다니|한국 노인 복지 자조회 사기사건의 전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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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생을 편안하게 해드리겠읍니다.』사단법인 한국노년복지 자조회가 창립총회 초청장(8일·세종문화회관)과 함께 각계에 보낸 사업계획서를 보면 그야말로 노인들의 유토피아.
서울에서 공기 좋기로 이름난 우이동의 임야 8만6천8백여평에 들어서는 각종시설은 ▲노인전용 아파트(독신용 7평·합숙용 12평·부부용 18평형)▲노인을 위한 의료원 ▲취미생활관·오락관·영사연예관등 위락시설 ▲각 종파에 따른 교회·성당·법당·모스크 등 종교관 ▲여가선용을 위한 운동장·목축장·묘목장·양봉장·화원·양어장·낚시터·수영장 ▲세탁소 ▲공원묘지 ▲민족관과 노인전용 도서관 ▲식당 ▲기타 시설관리물 등 시설 총 건평만 3만2천3백90평의「꿈같은 낙원」이다.
핵가족 사회의 외로운 노인들에게 이보다 더 정다운 목소리가 또 있을까.
사기 등 전과 2범의 주범 현씨가 착안한 것도 바로 이점이었고 이 사기극에 고위층의 친척들을 꾀어 끌어들였을 때 현씨는 쾌재를 부르며 성공(?)을 확신했다. 현씨의 계획은 완벽했다.
젊은이의 도움 없이 우이동의 그린벨트 안에 회원들이 낸 회비로 노인복지단지를 세우겠다는 그의 거짓 청사진은 늙으막의 외로움을 겪어봤거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계획을 세운 현씨에게 눈물겨운 고마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고위층의 친척들이 속아 함께 일을 벌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경찰은 밝히고 있다.
그는 우선 김모씨(S극장 사장)소유로 그린벨트에 묶인 8만6천여평을 풀어준다고 속여 1만7천여평을 무료로 기증 받은 다음『아파트의 입주기탁금으로 받게 될 3백48억원으로 82년2월까지 공사(공사비 1백78억원)를 마치고 나머지 1백96억8천만원을 국책은행에 장기예금해 그 금리수입을 기금으로 해서 노인단지를 운영하겠다』고 선전하고 다니며 회원모집에 나섰다.
현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더욱 완벽한 사기극을 연출하기 위해 정관을 준비했고『참 어른의 본(모범)이 되자』는 등 5개항의 노인강령까지 만들었으며 이밖에 그가 만든 7개항의 신조 가운데는 정구리복(조용한 가운데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이나 복을 구한다)이라는 제목도 눈에 띄었다.
이 같은 계획을 세운 현씨는 지난 8일 상오 10시 서울세종문화회관대회장에서 각계인사 1백1명을 발기인·고문·이사 등 자격으로 초청하여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창립 총회까지 했다.
경찰이 이들에 대한 수사에 나선 것은 현씨 일당의 창립총회 다음날일 9일 상오. 일요일인 이날 서울시경의 지능 사범 전담 요원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회장 현씨 집을 덮쳤으나 등산 갔다는 말에 현씨를 찾기 위해 등산복차림의 형사가 서울근교 등산코스에 비상 배치되기도 했다.
이날 하오 6시쯤 전상근씨와 전우환씨가 검거됐으며 현씨는 이튿날 제발로 시경에 걸어 들어왔다.
경찰은 사건의 성격상 수사요원 전원에게 함구령을 내리면서 서울회신동의 N호텔에 수사본부를 정해 담당 형사들도 아예 그곳으로 출퇴근토록 했다.
경찰은 그것도 부족해 도중에 수사본부를 H호텔로 옮겼고 수사본부를 다녀가는 모든 피해자와 참고인들에게는『수사내용·장소 등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한편 창립총회의 준비위원으로 초청장에 적혀있는 안호상 박사는『이름을 도용당했다』고 펄쩍뛰면서『1, 2개월 전 평소 안면있는 김모 목사(이름 기억 못함)가 찾아와 노인복지단지조감도를 보이며 취지를 설명하고 고문직을 말아달라기에 응낙했더니 얼마 후 보내온 초청장에 창립준비위원으로 되어있어 호통을 치고 총회참석도 안 했다』는 것이다.<오홍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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