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증」만 있고「물증」은 없다|윤 노파 살해혐의 고 여인 구속…불안한 진범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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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서울 원효로 여 갑부 윤경화씨(71) 피살사건수사본부는 수사착수 14일 만인 18일 새벽 윤씨의 조카며느리 고숙종씨(46)를 범인으로 단정, 강도살인혐의로 구속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그리나 수사를 담당한 경찰도, 사건을 지휘한 검찰도『범죄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서만 성립된다』는 형사사건의 증거재판주의 때문에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표정은 경찰의 구속영장에 서명한 뒤 한 검찰관계자가『고씨의 구속 그 자체는 수사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며 불안한 구속』이라고 실토한데서도 읽을 수 있다. 모든 정황증거를 종합해 볼 때 고씨가 범인이라는 심증은 가지만 이를 뒷받침할 직접 증거(물증)가 하나도 없다는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관련기사 10면>

<핏자국>
경찰은 지난 14일 하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부터 고씨의 원피스와 피살현장의 전등스위치에서 혈흔이 검출됐다는 구두통보를 받고 피묻은 원피스를 유일한 직접증거물로 보았다. 그러나 17일 하오 원피스에서는 혈흔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정밀감점결과가 정식 통보되자 유일한 직접증거가 무너졌다.
또 고씨의 임의진술에 따라서 찾아내 감정한 결과 혈흔이 나왔다는 가정부 방 옆 등 2군데의 형광등 스위치도 고씨의 지문이 없는 것이어서 진술을 번복할 경우 살인사건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자백>
고씨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된 유일한 근거는 고씨의 자백과 이를 전제로 한 정황증거뿐.
그러나 형사소송법(제310조)은『자백이 그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 일의 증거일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법정에서 자백을 근거로 유죄의 심증을 얻는 경우 그 자백이 피의자의 임의진술에 의한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이번 사건의 경우 경찰에서의 고씨의 자백은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고씨는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된 뒤 12일 동안 거의 잠을 못 잤다고 말했다. 이는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수사관이 추리한 허구사실에 고씨가 유도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이 얻어냈다는 자백의 신빙성도 문제가 된다.

<알리바이>
경찰은 이제까지의 수사에서 밝혀 번 몇 가지의「결정적인」정황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사건당일인 7월22일 밤8시부터 11시까지 알리바이를 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경찰조사에서 고씨는 12번이나 진술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사실이라 해도 정황증거는 될 수 있을지언정『따라서 고씨가 살인범』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패물>
고씨 집에서 찾아낸 윤씨의 패물 역시 가져간 시기가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이상 절도의 증거물 이상의 가치는 없는 데다 유죄의 입증자료보다 오히려 무죄의 자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씨가 진범이라면 범행 후 사건이 알려지기까지 13일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이를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범인이 아니라는 역 입증의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경찰의 처음 조사에서 고씨는 사건이 알려진 뒤 분실의 위험이 있어 집에 보관키 위해 가져왔다고 말한 적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한 불안감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범행동기>
범행동기도 석연치 않다. 경찰은 발표에서 ▲고씨가 속아서 결혼했고 ▲재산상속의 기대가 무너졌으며 ▲약속했던 아파트마저『사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저지른 순간적인 우발범행이라고 주장했으나 결혼 후 20년이 지난 지금 과연 그것이 항상『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사람을 포함해 사람을 셋씩이나 죽일 수 있는 절박한 동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살해 경위>
또 여자 혼자서 3명을 동시에 살해할 수 있느냐는 경험칙상의 의문점이다.
희대의 살인마 박철웅(사형집행)도 금당골동품상 부부와 운전사 등 3명을 살해할 때 내연의 처와 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이 사건의 경우 고씨가 움직이는 생명체를 차례차례 쫓아다니며 망치로 때려 죽였다는 데는 상식 선에서 일단 회의를 갖게 하는 점이다.

<오홍근·권 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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