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경제 읽기] 디플레이션이란 이름의 사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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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호 18면

디플레이션(deflation)은 ‘지속적으로 물가가 하락하는 상태’다. 인플레이션율이 ‘마이너스’라는 뜻이다. 물가상승 속도가 떨어지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과는 다르다. 디플레이션이 무서운 이유가 있다. 첫째, 빚의 실질가치를 높인다. 이 때문에 사실상 빚 부담이 늘어난다. 우리나라 같이 가계 빚이 큰 경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둘째, 가격하락이 기업의 영업이익을 떨어뜨려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면서 저성장을 초래할 수 있다.

디플레이션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소비나 투자가 위축될 때 ‘수요위축→가격하락’의 고리가 형성된다. 좀 더 발전되면 저성장으로 인해 임금이 하락하고 이것이 소득감소를 가져와 다시 수요가 감소하는 ‘수요축소→가격하락→임금축소→소득축소→수요축소→가격하락’의 소용돌이가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 소위 ‘디플레-저성장 소용돌이(deflationary spiral)’다.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경우다.

통화 공급의 축소 또는 통화 사재기(hoarding)도 디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 금본위제도 하에서 경화(硬貨)의 급격한 국외 유출(혹은 사재기)이 일어나 디플레가 초래된 전례는 역사적으로 매우 많다. 그 외에도 1870~1900년의 미국처럼 생산성이나 경제 효율성 증대(상품공급 증가)로 가격이 떨어지면서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런 디플레이션은 나쁠 것이 없다.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199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20여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7년간은 소비자물가가 연속적으로 마이너스 상승률을 보였다. 그 뿌리에는 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생산자물가 디플레이션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의 생산자물가 상승률은 92년부터 2003년까지 11년 동안 한 해(97년 0.7%)를 빼고는 11년 연속 마이너스였다. 이런 충격적인 디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92년 이후 2013년까지 21년 중 일본은행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경기침체기’는 다섯 번(91~93, 98~99, 2001~02, 2008~09, 2011)에 불과하며, 그 기간도 다 합해서 4년(전체 기간의 19%에 해당)이 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디플레이션=경기침체(혹은 위기)’라는 자동적인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98년 이후 몇 년간 디플레이션과 동시적 경기침체를 살리기 위해 총 100조 엔에 달하는 공공사업이 집행되었지만 이것도 디플레이션 대책이라고 하기 보다는 경기활성화 대책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디플레도 못 잡고 경기도 못 살리면서 재정적자만 늘리는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디플레이션이 수요나 통화의 문제라기보다는 더 뿌리 깊은 구조적인 문제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며칠 전 “한국이 디플레이션 초기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물가안정 목표 범위 2.5∼3.5%에서 3년째 하한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그러면서 “경제 전반에 퍼져 있는 축 처진 분위기를 반전시킬 모멘텀을 찾아야 한다”며 “금기시된 재정적자 확대, 부동산 시장 정책을 과감하게 하지 않고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디플레이션=경기침체=적극적 경기부양책 필요’를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명백하다. 지난 92년 이후 20여 년 중 절반이 넘는 13년 동안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 또는 마이너스였지만,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였던 적은 한 해도 없었다. 최근 2~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2%대로 떨어진 디스인플레이션을 ‘물가안정’으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이를 디플레이션의 전조로 두려워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국경제가 어렵긴 하지만 일본형 경기침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2%에도 못 미치는 경우는 92년 이후 2013년까지 17번 있었지만 한국은 외환위기와 서브프라임 위기(98년과 2009년) 때를 제외하면 92년 이후 한 번도 없었다. 지난해 한국의 경제성장률(2.8%)도 92년 이후 일본이 한 번도 달성한 적이 없는 ‘고성장’에 속한다. 물론 서브프라임 직후인 2009년 -5.5% 성장에 대한 반동으로 2010년 4.7% 성장을 제외하고 말이다.

위기를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경제정책은 옳고 또 좋다. 그러나 디플레이션이 아닌 것을 디플레이션이라고 하고, 경기침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경기침체라고 우길 일은 아니다. 나아가 일본의 정책 경험에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나 국가부채를 증대시킨다거나, 부동산 시장 과열을 초래하는 등의 정책을 남발하는 것은 조심할 일이다. 성공할지도 불확실하고, 책임지지도 못할 일들이다. 독감을 암(癌)이라고 진단해 항암제를 과잉 투여하는 것은 진(秦)나라 조고(趙高)가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것(指鹿爲馬)과 다를 바 없다. 좀 더 차근하고 신중한 정책을 주문하는 이유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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