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기능 못다하는 「거대조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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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코끼리처럼 거대한 조직이 은행이다. 은행마다 20개이상의 본점부서가 있고 1백수십개의 지점·간이예금취급소를 거느리고있다.
여기에다 서민금융 시대를 맞아 소형 점포를 대폭늘릴 방침이라고 한다.
5개 시중은행의 경우 평균 은행당 직원수가 7천명이 넘고 전체금융기관 종사자는 8만명에 이른다.
거대한 집단이다. 일하는 양으로는 일본의 은행들 보다도 훨씬 많은 인원이 일하고 있다.
우리나라 시중은행에 해당하는 일본의 13개 도시은행들의 평균 종업원수는 2만5천명선.
이인원을 가지고 30조원의 예금고를 지탱하고 있으니 일본의 은행원들은 우리보다 3배 조금 더 많은인원을 가지고 일은 3O배나 더하고 있는 셈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수있다. 우선 그들이 우리보다 전산화가 훨씬 앞서있어 사람손이 훨씬 덜 간다든가, 전산화문제를 떠나서라도 임금이 싸니까 현재로서는 컴퓨터보다도 사람쓰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든가 등등.
물론 이같은 전산화여부가 은행업무의 효율을 높이는데 가장 결정적인 요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말고도 우리네 은행들은 거대한 조직과 인원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뒤뚱걸음을 걸어왔다.
크고 작은일을 결정하는 과정을 들여다봐도 늘 뻑뻑하게 돌아간다.
여기저기 눈치살펴야하는 외부요인때문에도 그렇겠지만 내부조직 자체가 잘 돌아가지않는다.
무슨일을 하나 추진하려면 그렇게 힘들수가 없다.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느라 시간을 다 보낸다.
신중을 기해서라기 보다는 부서간에 「자기땅」을 지키려는 비생산적인 고집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일을 기획해서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는 사람·돈·시간·장소등 갖가지 재료들이 효과적으로 신속히 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은행의 각부서들은 여간해서 자기부서의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는다.
기획부는 무수정원안통과를 주장하는가하면 현업부서는 실상을 모르는 처사라고 비난하고 인사부는 인원문제를 틀어쥐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는 완벽한 업무분담처럼 보이지만 속셈을 뜯어보면 은행내부의 헤게모니문제나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의 면책주의가 강하게 깔려있다.
한마디로 은행조직은 철저하게 기능위주로 분화되어 있으면서 유기적인 연결이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자연 조직을 움직여 나가는데도 스태프나 라인의 구분이 명확해질리가 없다.
생색나는 일일 때는 모두가 라인이고 책임질 일이다 싶으면 모두가 스태프로 물러앉는다. 아무리 중요한 일도 인사부가 틀면 그만이고 자금부에서 딴데 쓸돈이 더 급하다고 딴전을 부리면 그만이다.
분화된 기능을 조직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끈이 없는 것이다.
자율화발표이후 일부 은행들은 뒤늦게나마 조직개편을 서두르고 있다. 은행도 종합상사들처럼 사업부제 시스팀을 도입해 부서별 책임경영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 공통된 방향이다.
프로젝트별로 일괄적으로 일을 맡겨서 알아서 하게하고 그 결과를 묻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부제의 도입도 시작부터 부서간의 심한 반발과 부작용에 직면하고 있으니 문제다.
껍질만 책임 경영제이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일의 습관은 그전과 조금도 달라진것이 없기 때문이다.
외국은행이 자율적이라해서 따질것 안따지고 적담히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책임한계는 오히려 더 철저하다.
가령 국제영업부에서 A라는 기업에 이러이러한 금리로 대출을 해주자고 주장하는데 반해 돈줄을 쥐고있는 영업부쪽에서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런 조건으로는 수지가 안맞다는 것이다.
국제영업부가 그래도 자기들 판단이 옳다는 결심이 선다면 손해나는 부문에 대해서는 국제영업부 자기들이 낸 이익금 중에서 메워주겠다고까지 나선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겠지만 그들은 이처럼 철저하게 따지면서도 분화된 기능을 살려나간다.
최근들어 은행마다 「토틀·뱅킹·시스팀」이니, 종합경영정보 시스팀이니 하는 새로운 제도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은행업무의 전산화를 통해 조직운영의 낭비를 막고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일반공장으로 말하면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야기다.
그러나 죽은 조직을 산조직으로 만들자는 것은 컴퓨터운운 이전단계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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