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야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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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울 수유동의 S교회. 저녁 8시가 가까와지자 한 손에는 핸드백, 옆구리에는 책을 낀 학생들이 좁은 계단을 올라 교실 문을 밀고 들어선다. 교실이라 했자 교회당 안에 흑판을 하나 더 걸어놓은 것. 공원이자 학생인 이들의 신분은 정규학교의 학생과는 다른 옷차림에서도 쉽게 판별된다. 대학생 5명이 근처 근로청소년 12명을 상대로 시작한 이 야학은 4개월 전에 문을 열었다. 하루 두 시간씩 수업에 1년 동안 중학전과정을 모두 마치도록 돼있다.

<서울에만 약 2백개>
우리 나라의 경우 야학은 그 역사가 제법 길다. 효시로 꼽는 것이 1907년 마산의 농민야학. 일제식민정책에 대응한 민족적 자각이 의식교육으로 발전, 출발한 야학은 3·1운동 이후는 민족의식의 고취와 함께 크게 확대됐고, 30년대는 언론기관에서「한글보급운동」「보나르도운동」등 계몽교육의 한 형태로 확산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절대다수인 농민을 대상으로 한 반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지금은 도시의 근로·직업청소년을 교육하는 점이 다르다.
일제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교육기관이 늘어났지만 그래도 교육기회를 잃은 층이 있어 야학이 존재한다. 관계자들은 80년말 현재 서울에만 약 2백개의 야학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야학운영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는 의욕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가난한 주머니 돈을 털어 야학을 운영하기 때문에 장소나 기타 재정적 도움을 독지가로부터 받기도 하지만 엉뚱한 마찰로 야학이 문을 닫아 학생들만 피해를 보는 수도 있다. 서울 중심가의 S교회의 경우 이곳에서는 지역사회교사와 대학생들이 불우청소년을 대상으로 10년 넘게 야학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80년2월 새 목사가 부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시끄럽고 전도사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야학장소로 사용하던 교회복지관을 폐쇄해버린 것이다. 교사와 학생들의 호소와 합의가 계속됐지만 장소를 잃은 야학은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특정 독지가의 도움을 받을 경우 학생들을 자신의 자선사업선전용으로 수시 동원을 요구하거나, 학교운영 및 교육내용을 간섭하는 것도 야학관계자들이 자주 호소하는 어려움의 하나다.
서울에서 3년 동안 야학을 해온 유모씨(31)는『학생들이 선생에게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아 정규학교에서보다 일하기가 훨씬 어렵다』고 털어놨다. 이 같은 과중한 부담감은 교사들의 잦은 결강과 중도포기를 초래, 끝내는 야학자체가 흐지부지 문을 닫고 만다는 설명이었다.
유씨는 이밖에도 ▲정규학교의 교과서를 그대로 이용, 근로청소년에게 실질적인 교육을 하기 힘들고 ▲학생들의 직업·연령격차에 따른 교육의 애로 등을 야학교육의 문제로 지적했다.
그러나 야학생들의 향학열이나 긍지는 대단하다. 부산대 정서환 씨가 야학생 2백9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는 62.5%가 야간학교에 다니는 자신을「자랑스럽다」고 대답했다.
교복을 해 입자거나, 야학을 마치면 수료증을 원하는 현상은 이 같은 높은 긍지에서 비롯된다.
서울 구로구에서 야학을 하는 김모교사는『그들의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교복을 해 입으려면 학생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게 되고, 수료증만 해도 인가가 없는 야학으로서는 불가능하다』면서 야학생들의 이런 요구를『내적 공허감이 불러온 하나의 표출행동』이라고 안타까와했다.
야학생들의 고민은 최근 검정고시야학의 성황에서도 나타난다. 검정고시합격자의 진학률이 높아지자, 근로청소년들은 검정고시준비를 하는 야학에 몰려든다. 실제 YMCA직업학교의 경우, 작년의 80명에 비해 금년 입학희망자는 1백80명, 또 천호동에 있는「선우제일학교」의 경우도 검정고시준비과정을 가르친다는 말이 나자 작년에는 7명에 그쳤던 지망자가 22명으로 늘었다.

<입시위주로 달려>
학력이 낮은 그들로서는 검정고시가 유일한 학력취득의 창구이기 때문에 야학관계자들은 이들의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검정고시준비는 어차피 입시위주의 교육이 될 수밖에 없고, 현재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을 야학 청소년에게도 그대로 옮겨놓을 경우, 야기될 결과를 이들은 우려한다.
연대 김인회 교수는『불우청소년에게는 일반청소년보다 전인적인 교육이 더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입시위주의 검정고시준비에만 몰두한다면 자칫 학벌, 출세지향의 가치관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균형적인 교육제도의 완비가 사실은 가장 바람직하지만 당장은 이뤄질 수 없는 일이므로 당국이나 사회단체가 가르치겠다는 사람과 배우겠다는 청소년이 만날 수 있는 장소라도 충분히 마련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장성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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