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책 없는 만남은 무익 … 사태해결 촉진제 역할 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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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06면

세월호특별법 정국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민생 행보를 밟고 있다. 지난 22일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상인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중앙포토]

“대통령이 교황은 아니지 않은가. 현시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유가족을 만나는 건 적절치 않다.”

박 대통령-세월호 유족 만남 평행선, 해법은 뭔가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을 만날 때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국민대 김병준(행정학)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역임한 전력으로 볼 때 “당연히 만나 위로해야 한다”는 답변이 예상됐지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김 교수는 “단순히 위로의 뜻을 전하거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대통령은 언제나 누구든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특별법 같은 중대 사안을 놓고 결단을 해야 하는 국면이라면 대통령은 함부로 나서선 안 된다. 관련자를 만난다면 미리 대안을 갖고 만나야 한다. 어설프게 등장하면 정국을 더욱 꼬이게 할 뿐”이라고 단언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47)씨가 지난 28일 단식을 중단해 극단적인 대치 상황은 꺾였지만 세월호특별법 정국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여야와 유가족이 복잡하게 얽혀 협상이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민 상당수의 시선이 박 대통령에게 꽂히고 있다. “김영오씨를 만나 손 좀 잡아달라. 그러면 꼬인 정국이 풀리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어머니의 심정을 가져달라”는 호소도 빠지지 않는다.

이에 대해 중앙일보가 지난 26~27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대통령이 유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의견과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 각각 49.5%로 똑같았다. 그야말로 ‘대통령의 세월호 희생자 가족 면담’을 두고 대한민국 국론이 두 동강 난 상태다.

노무현 “경제 해법 없이 상인 안 만난다”
김 교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2006년 초였다. 청와대 참모진이 노 대통령에게 ‘경기가 너무 안 좋으니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 손을 잡고, 목도리라도 둘러주시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거부했다. 며칠 뒤 참모진이 같은 건의를 반복하자 노 대통령은 역정을 냈다. ‘나보고 자꾸 시장 가라는데, 내가 가서 뭐가 달라지나. 선거 때면 쇼가 필요할지 모르지. 또 내가 교수나 종교 지도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이리저리 해서 경기를 살릴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는 구체적인 대안을 당신들이 갖고 오면 당연히 상인들을 만나겠다. 그런 것도 없이 무조건 만나라고 하면 어떡하나’는 일갈이었다.”

김 교수는 “대통령은 한정된 자원을 다룬다. 무한정 퍼줄 수 없다. 여야 정치권이 문제를 벌여놓은 뒤 대통령에게 수습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유가족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타협책을 내놓을 수 없는 이상 박 대통령이 유가족을 만나는 건 의미가 없다.”

한국교통대 임동욱(행정학·한국대통령학연구소 부소장) 교수의 의견도 비슷했다. “대통령은 잽을 날리는 사람이 아니다.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한다.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을 때 나서야 한다는 거다.”

그럼에도 “아픈 사람 있으면 보듬어주는 쇼라도 하는 게 나라님 할 일 아닌가”란 정서가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연세대 문명재(행정학) 교수는 “국민 상당수가 이성적으로는 민주적 리더십을 원하지만 정서적으론 ‘대통령=왕’이란 전근대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을 지냈던 김광웅 명지전문대 총장도 “대통령은 메시아가 아닌데도 무조건 나서주기를 바라는 국민의 심리 기저엔 ‘대통령이 맨 위에 있다’란 사고가 깔려 있다”며 “그만큼 한국 사회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버리지 못한 것”이라 진단했다. ‘제왕적 대통령’의 임기와 권한을 축소시키는 데 집중해온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 역설적으로 ‘대통령=만능 해결사’란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국민에게 퇴행적인 대통령관을 심어줬다는 지적이다.

박 대통령, 마무리 시점 잘 찾아야
하지만 박 대통령이 무조건 유가족 면담을 회피하는 게 정답은 아니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국정의 무한 최고책임자로서 이견을 조정하고 국민을 통합해야 할 책무가 크기 때문이란 것이다. 문명재 교수는 “대통령이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을 필요는 없지만 핵심 현안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물꼬를 트는 촉진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여권 고위 관계자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대신 친박 핵심인 이완구 원내대표가 유가족과의 대화를 주도하는 데서 청와대가 유가족과 간접적으로 소통하려는 뜻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여론에 떠밀려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유가족을 만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하나회를 전광석화처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세주도형 지도자’였다면 박 대통령은 민감한 사안을 조용히 주시하다가 마무리 시점에 등판해 매듭을 지으려 하는 ‘대세편승형 지도자’의 전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세월호 진상조사위에 기소권·수사권을 부여하라는 유가족들의 요구를 박 대통령이 전격 수용하면서 유가족을 만나는 대안은 어떨까. 이와 관련해 김병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또 다른 에피소드를 전했다. “2006년 여야가 사립학교법 처리를 놓고 극한 대치를 이어가자 노 전 대통령이 정국을 풀겠다는 취지에서 한나라당(당시 야당)안을 일부 수용했다. 야당 요구를 일부 들어주고 더 큰 것을 얻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진보 세력이 ‘노무현이 변절했다’며 극력 반발하면서 타협안은 동력을 잃고 말았다. 결국 사학법 처리는 물 건너가고 지지 기반마저 떨어져나가 혼란만 가중됐다.”

대통령이 갈등 사안을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섣불리 전면에 나서면 지지층이 이반해 리더십이 더욱 상실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여야 지도부와 거리를 두지 말고 자주 대화하는 데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광웅 총장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야당인 공화당의 상·하원 원내대표와 거의 매일 수시로 전화한다. ‘내 숙원인 ○○ 법안만큼은 꼭 통과시켜주시라’고 부탁하고 사정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창피한 행동이 아니다. 바로 이런 게 대통령의 정치력이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들은 야당 대표 만나는 걸 정치적 항복이나 치욕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박 대통령뿐 아니라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의도와 거리를 두는 걸 당연시 여겼지만 그 결과 본인의 국정 장악력이 급락하고, 추진했던 정책 상당수가 장기 표류하는 결과를 빚었다”며 “민주주의의 본령인 의회주의 착근을 위해서도 대통령이 국회와 자주 대화해야 한다. 또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의 만남을 놓고 ‘청와대가 야당에 항복한 것’이란 식으로 해석하는 정치문화도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원용 전 이화여대 교수도 “국민들이 영화 ‘명량’에 열광하는 이유는 군림 대신 설득하는 지도자를 원하기 때문”이라며 “꼬인 정국을 해결할 마지막 열쇠는 대통령이 쥐고 있는 만큼 늘 어느 시점에, 어떻게 나설지를 숙고한 뒤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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