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비관주의자보다 더 위험한 낙관주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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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긍정의 오류
로저 스크루턴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96쪽, 1만5000원

도박꾼과 선거꾼이 지닌 공통점이 있다. 노름꾼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잃어도 자기만은 딸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에 이끌려 도박판에 들어간다. 선거에 중독된 사람들은 밑도 끝도 없이 당선 100% 확신으로 선거판에 뛰어든다. 이 두 부류는 영국 출신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로저 스크루턴(70)이 대표로 꼽는 비양심적인 낙관주의자의 상징이다. 스크루턴은 지금 세계경제의 목을 죄고 있는 ‘신용경색’이야말로 이런 양심에 털 난 낙천주의자들이 꾸민 ‘최상의 시나리오 오류’라고 지적하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인간도 문제지만 너무 낙관적인 인간은 더 큰 재앙이라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요지다. 특히 입으로는 소통(疏通)이라면서 마음으로는 불통(不通)인 지도자들을 향해 그는 “헛된 희망의 자리에 진정한 희망을, 복수의 자리에 용서를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거짓 희망을 유포하는 자들, 자유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 주장하는 도식적 의회주의자들은 염세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낙천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꼽만큼도 믿어 의심치 않는 오류가 저지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절대 지지 않는다. 그 위험에 대해서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 확신과 무책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물 유형 아닌가.

 인간 집단이 저지르고 있는 낙천주의적 오류를 스크루턴은 여섯 가지로 정리했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난다는 주장의 오류 ▶유토피아 오류 ▶제로섬 오류 ▶계획의 오류 ▶움직이는 정신의 오류 ▶총합의 오류다. ‘오류’란 단어 앞쪽의 명제들은 대부분 인류 발전의 원동력으로 제시돼 온 것들이지만 파란불을 빨간불로 바꿔놓고 들여다보면 180도 거꾸로 해석할 수 있는 대뇌 속 ‘씽크 홀(Think Hole)’이다.

 세상을 너무 쉽게 살아왔다거나, 대체로 건전하고 온건한 방향으로 세계 발전을 내다본 사람이라면 ‘나는 혹시 낙관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할 일이다. 지구를 덮어오며 점점 커질 거대 권력, 질병과 고령과 무능력과 죽음 같은 인류의 오랜 적들을 정복할 능력을 키워가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에둘러서 조언한다. “약간의 염세주의는 온갖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지혜의 목소리 역할을 할 것이다.” 이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고 싶은 당신, 제발 적절한 비관의 효용을 숙고하시라고 말하는 쓴 약 같은 책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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